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북핵 문제 등 당면 현안에서 '큰 틀'의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 정상회담 이후 큰 틀의 합의를 떠받치는 여러 가지 '작은 틀'의 합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북한과의 대화 조건으로 미국은 '올바른 여건'을 강조했다고 하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조건을 특정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올바른 여건'의 해석을 놓고 이견이 노출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런 세부적 사안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못하면 정상회담은 '사진만 찍은' 회담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배치 일정도 이를 가늠하는 핵심적 사안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사드는 의제에 오르지 않았다. 양국이 일부러 뺀 것이다. 그만큼 '뜨거운 감자'다. 정상회담이 순탄하게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양국 모두 당장은 이 뜨거운 감자를 삼킬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앞으로도 이 감자가 쉽사리 식을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감자를 뜨겁게 달군 불길을 일으킨 청와대 내 소위 '자주파들'의 신념-북한이 핵과 미사일 등 여러 가지를 시험 발사했던 것은 오래전부터였다. 법적 투명성과 절차를 생략하면서까지 설치로 가야 하나?-를 보면 그렇다.
문 대통령은 방미 중 미국 의회 지도부와 만나 "사드를 번복할 의사를 가지고 그런(환경영향평가) 절차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버려도 좋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문 대통령 자신부터 사드에 부정적이었던 생각을 바꿔야 함은 물론 지지층까지 설득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지지층의 이반(離反)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에는 그렇게 한 인물이 있다.
소련은 1975~1976년 서유럽을 겨냥해 핵탄두를 탑재한 신형 중거리 미사일 SS-20을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배치했다. 이에 맞설 무기가 없었던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는 1979년 이른바 '이중결의'(Double-track decision)를 채택했다. 우선 미국과 소련의 협상을 통해 4년 이내에 소련 미사일을 제거하되, 성사되지 않으면 서독 등에 미제 퍼싱Ⅱ 핵미사일(108기)과 순항미사일(464기)을 배치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주도한 이가 진보 성향인 사회민주당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였다.
그러자 서독 전역에서는 동독 공산당과 연계된 반핵 단체들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사민당도 반대파 일색이었다. 빌리 브란트 당 총재부터 그랬다. 그러나 슈미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미제 핵미사일 배치는 반대하면서 그 원인인 SS-20에는 입을 닫은 반대파들의 이중성을 질타하면서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그 대가로 슈미트는 총리직을 잃었다. 1982년 자민당과의 연정이 붕괴되면서 제출된 내각 불신임안에 사민당 내 '좌파'들이 대거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책을 계승한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의 주도로 서독 의회는 불과 1년 뒤인 1983년 11월 퍼싱Ⅱ의 서독 배치를 결정했다.
이는 소련에 치명적이었다. 서독에 배치된 퍼싱Ⅱ는 발사 7분 만에 모스크바에 떨어진다.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는 훗날 "'퍼싱Ⅱ가 발사되면 경계경보를 발령할 시간도 없다'는 군부의 보고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것이 슈미트가 노린 것이었다. 소련은 군축 협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침내 1987년 중거리핵미사일폐기협정(INF)에 서명했다. 슈미트의 노림수는 멋지게 들어맞은 것이다. 이는 확실한 억지력만이 안보를 지킬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재확인해줬다. 문 대통령이 대북 정책을 구상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이제 사드 논란은 잦아들었다. 문 대통령은 '사드는 걱정말라'는 발언을 뒤집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드 배치를 둘러싼 한미 간 불협화음을 촉발시킨 문 대통령의 일련의 국내 발언들은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였다. 미국에 가서 미국의 의구심을 불식시킬 얘기를 왜 국내에서는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는 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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