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거의 모든 불교 경론에 주석
현존 20여 종 대부분 일본에 있어
에도 말기 낱장으로 찢겨져 거래
완전 소실 막은 역사의 아이러니
'세계의 창'에 올릴 칼럼을 준비하면서 시중에 나와 있는 신문을 이리저리 뒤지고 마감 직전까지 시사에 뒤떨어지지 않는 글의 소재를 찾는다. 항상 그렇지만 이달 역시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시작으로 북핵, 탈원전 등 급급한 주제는 넘쳐난다. 그런데 이 어떤 이야기보다 "원효 '판비량론'의 잃어버린 조각 일본서 발견"이라는 기사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천 년 이천 년 긴 시간 속에서 작고 작은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우둔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난 24일 원효대사 탄신 1천400주년을 기념해서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HK연구단과 가나가와 현립 가나자와 문고가 '원효와 신라불교사본'이라는 주제의 한일 공동학술대회를 일본 가나자와 문고에서 개최했다. 최근 위안부 문제를 대두로 불편한 관계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학술교류를 통한 민간외교가 이어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 아니겠는가.
원효대사는 불교 경전 연구에 힘을 기울여 당시 전해진 거의 모든 경론에 대한 주석서를 저술하였으며, 그 수가 100여 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존하는 것은 20여 종, 그나마 대다수의 판본이 일본에 있는 것으로 안다. 이날 많은 발표가 있었는데 게이오대학의 오카모토 잇페이(岡本一平) 강사가 "교토 도지(東寺)에서 흘러나와 현재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고서 필사본 낱장이 판비량론의 단간(斷簡)으로 확인됐다"는 발표를 했다. 세로 25.7㎝, 가로 7.7㎝의 종이에 20자씩 5행, 총 100자의 초서체 글자가 쓰여 있는 필사본이다.
판비량론은 원효의 불교사상을 대표하는 저술인데 완본은 전해지지 않아서 필사본 조각들을 가지고 실체를 더듬고 있는 바이다. 필사본 조각 중 대표적인 것은 현재 오타니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오타니본(本)'과 오치아이 히로시(落合博志)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오치아이본'이다. 그 외 미쓰이 기념관, 고토 미술관, 도쿄 국립박물관이 판비량론 필사본 조각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재미난 것은 제작 방법과 글씨체로 보아 이것은 모두 한 권의 책이었는데 에도시대 말기에 조각조각 나눈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왜 굳이 조각조각 나누었을까. '단간'은 '떨어지거나 빠져서 완전하지 못한 글월'을 말하는데, 일본에는 옛날 이름난 명필가나 가인이 쓴 글을 자른 것이라고 해서 '고히쓰키레'(古筆切)라는 단어가 있다. 위에서 '필사본 조각'이라고 한 것은 바로 '고히쓰키레'를 말하는 것이다.
16세기 말, 평화로운 세상이 되면서 지식인층 사이에서는 옛 귀족들이 주고받은 시가집을 탐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필적을 흉내 내고 싶어서, 또한 감상하기 위해서이다. 원래 가보로 소유했겠지만 곤궁해진 귀족들이 이것을 내놓으면서 유통이 시작되었고 애호가들이 증가하자 한 장씩 잘라서 가격을 흥정했다. 또한 다도가 유행하면서 '인생에 단 한 번의 만남'(一期一會) 정신 아래 주인은 차 마시는 공간을 정성껏 준비했는데 고히쓰키레를 가지고 족자를 만들어 벽에 걸었다. 시가집만이 아니라 이야기집. 일기 등의 사본, 에마키(두루마리로 된 이야기 그림), 불경도 낱장으로 찢어져 족자가 되기도 하고, 병풍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귀한 소장품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완본이 아니라 낱장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게 되었다. 한 권이 번듯하게 나타나면 얼마나 좋겠는가만 이렇게 조각조각 소장된 고로 오히려 문화재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소재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전란이 있어도 화재가 있어도 통째로 소실되는 일 없이 일부라도 전해지는 기적을 낳았다. 판비량론 필사본들은 모두 한 권의 책이었는데 에도시대 말기에 조각조각 나뉜 이유도, 또한 지금에야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렇게 모여진 소중한 자료들을 가지고 지난 한일의 관계사를 논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다. 적어도 이것을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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