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울릉도 개척史 '검찰사의 길' 가다] <3>태하~현포~천부~나리동

깊은 산속에 숨겨진 별천지…일천 가호 거뜬히 살 만큼 넓어

화산 분화구 속에 자리 잡은 나리동은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마을 입구 고갯마루 전망대에 오르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너른 땅에 퍼즐 조각처럼 밭이 펼쳐진다.
화산 분화구 속에 자리 잡은 나리동은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마을 입구 고갯마루 전망대에 오르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너른 땅에 퍼즐 조각처럼 밭이 펼쳐진다.
검찰사 일행이 뱃길로 이동한 북면 해안. 울릉도 해안경관의 백미로 꼽히는 곳이다.
검찰사 일행이 뱃길로 이동한 북면 해안. 울릉도 해안경관의 백미로 꼽히는 곳이다.
알봉 마을 입구에 있는 투막집
알봉 마을 입구에 있는 투막집
나리 마을에서 알봉 마을로 이어지는 울창한 숲길.
나리 마을에서 알봉 마을로 이어지는 울창한 숲길.

살 만한 땅

고개를 넘으니 흑작지였다. 둔덕 안쪽으로 수십 호가 살만했다. 곳곳에 돌무지가 보여 이유를 물으니 고대인의 무덤이라 했다. 포변으로 내려와서는 배를 타고 나아갔다. 물이 고요했으므로 노 젓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섬에서 너무 멀어지지 말게. 세세히 살필 것이니."

섬 북쪽에 창우암과 추봉이 수천 장 높이로 서 있었다. 창우암 뒤로 사람이 살 만한 터가 보이고, 그 아래 바위에는 성문과도 같은 큰 구멍이 나 있었다. 바다 가운데에 솟은 홍예암은 한가로웠다. 기이한 모습이 화원 유연호의 화폭에 고스란히 옮겨졌다.

배는 풍경을 훑으며 서서히 나아갔다. 멀리 포변에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배는 미끄러지듯 왜선창포에 다다랐다. 포변의 사람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오매 나리, 지들은 전라도 흥양 초도서 왔어라. 배를 맹글며 매욱 쪼까 따고 있었어라. 나…나리, 살려 주셔라."

"재목이 제법 쓸 만하구나."

규원은 꾸짖지 않았다. 베어놓은 재목과 그들이 만들고 있는 배를 살핀 후 걸음을 재촉하였다. 홍문가를 지나서 가파른 고개를 넘었다. 가는 길마다 키 큰 소나무가 빽빽이 숲을 이루었다. 뒤틀림 없이 쭉 뻗은 나무는 누구라도 탐낼 만하였다. 족히 한 시진쯤 치고 올랐다. 기진맥진한 일행들을 위해 고갯마루에서 잠시 여장을 풀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구름이 드리워졌다 걷혔다. 구름 사이로 간간이 형세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낮게 드리워진 구름이 걷히자 고갯마루 아래에 널찍한 초원이 펼쳐졌다. 사방으로 산봉우리 수십 개가 하늘에 박혀 있었다. 봉우리 사이가 가까운 듯 멀었다. 초원은 급하게 치솟은 산줄기가 급하게 내려와 푹 꺼진 채 평탄한 대지를 이루었다. 평지의 끝과 끝이 실로 멀고 넓었다. 초원으로 내려서서 어른 키만큼 자란 풀숲을 헤치고 나아갔다. 억새가 빼곡한 연못의 흔적을 지나니 뽕나무와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구름은 풀과 나무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었으며 바람에는 달콤한 향기가 묻어 있었다. '깊은 산속에 숨겨진 별천지라….' 규원은 도화원기 속을 거니는 듯 신비롭고 아늑함을 느꼈다.

"나으리, 산줄기의 밑 부분이 교차되어 기가 빠지는 것을 막는 형국이옵니다. 거칠고 두꺼운 산봉우리가 사방으로 겹겹이 둘러쳐져 천연의 성곽을 이루니 관문만 잘 방어한다면 일만의 대군도 뚫지 못할 것이옵니다."

초원 한가운데서 심의완이 말했다. 규원은 다시 사방의 산세를 훑었다. 정말 그러하였다. 풀숲을 뚫고 천천히 중봉으로 나아갔다. 꽤 오래된 듯한 산신당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정갈한 성황의 화상에서 지극히 정성스러운 손길이 묻어났다. 신당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딘가에 사람이 살고 있을 법했다. 규원은 성황 앞에 정갈히 절을 올렸다. 믿음이 깊으면 후히 보답한다는 성황께 오래오래 기도를 올렸다. 중봉 기슭엔 초막이 흩어져 있었다. 억새와 나무를 얽어 지은 초막에 족히 쉰 명은 살고 있는 듯했다.

규원은 지나온 나리동 초원과 중봉 들판을 떠올렸다. 한 고을이 되기에 충만했다. 일천 가호가 거뜬히 살 만큼 너른 땅이라고 생각했다. 천 년 솔바람이 사방으로 드나들어 농사가 번창할 것이다. 규원은 마음이 벅차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전하, 실로 은둔의 누리이옵니다. 대해를 건너오는 번거로움이 무엇이 해로우리까. 개척한다면 망망대해 이 고을에도 전하의 덕화가 미치어 전하의 법도가 바로 설 것이옵니다. 누군가는 끝내 이루어야 할 성업이라면 분명 전하의 몫이옵니다. 은혜를 베풂과 동시에 위엄을 보이시어 개척을 행하신다면 진실로 이루어진 보람이 있겠나이다.'

두견새 우는 소리가 가까웠다. 늦은 밤, 화원 유연호가 그린 나리동은 꽃봉오리와도 같았다. 그림은 어머니의 품에 귀환한 듯 아늑하고 투명했다. 섬은 세상으로부터의 절연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열망의 누리로 피어나고 있었다.

박시윤 작가

◆옛 사람의 흔적 곳곳에

태하에서 하룻밤을 묵고 3일 오전 일행이 도착한 곳은 흑작지로 지금의 현포 마을이다. 북면 현포리는 과거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규원도 이곳에서 옛 사람의 흔적을 발견한다. 이규원은 이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두루 지형을 살펴보건대 남남동쪽으로 터를 잡았고 너비가 10리, 길이가 6~7리쯤 되었다. 그 안에 간간이 석장(石葬)한 흔적이 있었으며 수십 호의 사람들이 살 만한 땅이었다.'

일기에 등장하는 '석장'은 울릉도 곳곳에 산재한 고분을 말한다. 울릉도 고분은 지상에 돌을 쌓아 만들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띈다. 조선시대 울릉도 지도를 보면 '석장'이 빠지지 않는데 그만큼 도굴꾼의 표적이 되기 쉬웠을 것이다.

울릉도에 대한 고고학적 첫 조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해방 이후 국립박물관이 1957년과 1963년 두 차례 유적 발굴에 나섰지만 상당수 고분이 이미 도굴되고 파괴된 상태였다. 당시 확인된 고분은 모두 87기로 전체의 40%가 넘는 고분이 현포리에서 발견됐고 주로 통일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후 몇 차례 정밀지표조사가 있었지만 6세기 이전 울릉도에 우산국이 있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는 달리 지금까지 발견된 유물과 유적은 대부분 삼국시대 말부터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1997년 서울대박물관이 고인돌로 추정되는 3기의 유적을 발견해 울릉도의 역사가 6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가능성을 제시했으나 학계는 "이후 조사에서 관련 유물이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는 등 그 시기를 확신하기 어렵다. 보다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며 유보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512년(지증왕 13년) 신라가 우산국을 정벌했다'는 삼국사기 내용이 허구가 아니라면 그 이전 울릉도 원주민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노혁진 한림대 사학과 교수는 "이런 증거를 찾기 위한 고고학적 탐사는 계속돼야 하며, 고분 대다수가 밭과 구릉에 그대로 있어 파괴되거나 변형될 우려가 있는 만큼 보존 대책도 시급하다"고 말했다.

◆울릉도 해안 경관의 백미

울릉도는 바닷속 화산 분출로 솟아오른 화산체다. 덕분에 섬 전체에는 기암절벽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절경이 이어진다. 어딜 가더라도 허투루 지나칠 풍경이 없다. 그래도 해안 경관의 백미를 꼽으라면 단연 북면이다.

태하에서 현포령을 넘어서면 북면 땅이다. 이곳에서 천부를 지나 해안 일주도로가 끝나는 섬목까지 이어지는 해안은 울릉도에서 가장 웅장하고 다채롭다. 수천 개 돌판을 쌓아놓은 듯한 노인봉과 하늘을 찌를 듯 뾰족이 솟은 송곳봉, 코끼리 모양의 공암, 세 선녀의 전설을 간직한 삼선암, 두 개의 해식동굴이 뚫려 있는 관음도 등 울릉도를 대표하는 해안 절경이 대부분 이곳에 있다. 게다가 바다는 '여기가 정녕 우리나라인가' 싶을 만큼 물빛이 맑고 푸르다. 해안가 포구를 살피기 위해 현포에서부터 배로 이동했던 검찰사 일행도 이 같은 풍경에 감탄했다.

이규원이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섬 북동쪽 왜선창포로 불렸던 천부 마을이다. 왜선창이란 이름은 당시 일본인들이 이곳에 상주하며 대규모 벌목을 일삼았고, 베어낸 나무를 도동 등으로 실어내기 위해 배를 대던 데서 유래했다.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곳엔 바닷가 동쪽 나지막한 언덕 위 '일몰 전망대'가 있다. 송곳봉과 공암, 천부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검찰사 일행의 뱃길을 그려볼 수 있는 장소다.

검찰사 일행은 천부에서 점심식사를 한 뒤 나리동으로 향했다. 이규원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다시 길을 떠나 중곡(中谷)으로 들어가서 다섯 번 큰 고개를 넘었다. 가장 아랫고개 이름은 홍문가(紅門街)였다. 고개를 넘어 들어가니 울릉도의 중심인 나리동이었다.'

홍문가는 천부에서 나리동으로 가는 산중턱 마을이다. 지금은 홍문동으로 불리는데 마을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시멘트 포장도로가 이곳을 거쳐 나리동으로 이어진다.

옛날 주민들이 오가던 길은 따로 있다. 천부 마을 서쪽 천부초등학교를 끼고 산비탈을 따라 오르는 길이다.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40여 분 가다 보면 홍살문이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난다. 검찰사 일행도 이 길을 통해 나리동에 이르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보석 같은 오지 마을

'과연 하늘이 감추어 둔 별세계였습니다.'

울릉도 검찰을 마친 이규원은 임금에게 올릴 장계에 나리동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의 표현처럼 화산 분화구 속에 자리 잡은 나리동은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마을 입구 고갯마루 전망대에 오르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너른 땅에 퍼즐 조각처럼 밭이 펼쳐진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는 고영환(57) 씨가 말했다. "예전에는 참 살기가 힘들었어요. 벼농사가 안 되는 땅이라 옥수수나 감자 농사를 지어 주식으로 삼았죠. 쌀밥은 명절이나 생일에만 먹는 특별식이었고."

여름 더위가 꺾이고 오징어철이 되면 남자들은 천부항 근처에 움막을 짓고 고깃배를 탔다. 눈이 오면 설피를 신고 투막집 지붕에 올라 쌓인 눈을 치웠다. 배고픈 춘궁기에는 산속을 헤매며 명이나 고비 같은 산나물을 캤다. "50, 60년 전에는 100여 가구가 살았다는데 지금은 18가구만 남았어요. 그래도 요즘은 관광지로 알려지면서 살 만하죠. 고가의 산나물 재배도 많이 하고."

나리 마을에서 성인봉으로 이어지는 울창한 숲길을 20분쯤 가다 보면 나리 마을보다는 작은 또 다른 평지에 이른다. 알봉 마을로 불리던 곳이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7가구가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한다.

서면 남양리에 사는 김인수(72) 씨는 알봉 마을이 고향이다. 김 씨는 이곳에서 20여 년을 살다 1972년 천부로 내려와 오징어잡이 배를 탔다. "내가 해방둥이잖아. 어른들이 해방되는 것도 몰랐다 쿠데. 전쟁 났는지도 한참 뒤에야 알았지. 울릉도에서 제일 오지인 탓에 본토 소식을 몰랐던 거야."

울릉도에서도 적설량이 가장 많은 나리분지엔 전통 가옥인 너와집과 투막집이 잘 보존돼 있다. 나무판자나 억새 등으로 만든 우데기를 돌려 눈이 집 안까지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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