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 파워 인터뷰] 혼을 담은 자수 열정 이용주 작가

"세계가 감동한 초상화 자수…국내외 유명인사 수놓았죠"

한국자수를 새롭게 재창조한 이용주 작가가 세계적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의 초상화 앞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이 작품은 베컴이 입은 니트와 팔에 난 털의 감촉까지 직접 느낄 수 있다. 이용주 작가는
한국자수를 새롭게 재창조한 이용주 작가가 세계적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의 초상화 앞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이 작품은 베컴이 입은 니트와 팔에 난 털의 감촉까지 직접 느낄 수 있다. 이용주 작가는 "시각장애인들은 그림을 어떻게 감상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감촉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박노익 대기자 noik@msnet.co.kr
조계종 진제 종정이 요청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초상작품.
조계종 진제 종정이 요청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초상작품.

경주 혼자수미술관에서 만난 이용주(61) 작가의 작품은 살아 있었다. 왼쪽에서 보면 해가 뜨기 직전의 경주 불국사 모습이지만 걸음을 오른쪽으로 옮기며 바라보면 해가 완전히 솟아오른 후 눈 부신 햇살 아래에 선 웅장한 불국사가 보인다. 첨성대도 예외가 아니다. 왼쪽에서 볼 땐 바람 부는 밤하늘 속에 외로운 첨성대가 나타나는 반면, 오른쪽에서 보면 눈발이 쏟아지는 장관으로 변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 그림(자수 작품)이 달라지는 것은 홀로그램 현상 때문이다.

"작가로서 평생 '빛'과 '색'을 화두로 삼았습니다. 자수를 통해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겠다고 다짐했을 때부터 '누구도 함부로 흉내 내거나 따라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2004년 '사실감 나는 손자수물과 방법'으로 발명특허를 획득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학벌로 인해 2류라는 사회적 편견에 맞서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그랬다. 이용주 작가의 작품을 실제로 한 번 보면 누구나 감탄하지만 '인정'에는 인색한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었다. 지금도 작가가 20년을 해온 교과서에 나오는 명화 작품만 보고 "단순한 모방작품 아니냐"며 비하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창작품을 보는 세계는 달랐다. 2013년 이스탄불-경주 세계문화엑스포 당시 8천500년의 그리스'로마'오스만 문화를 선도해온 세계적 역사문화도시 터키 이스탄불이 이용주 작가의 작품으로 인해 충격과 감동에 빠졌다. 그들은 이용주의 혼자수 작품으로 말미암아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탄불에서 열린 문화역사포럼이 마무리될 즈음 톱바쉬 이스탄불 시장이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을 불러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리고 톱바쉬 시장은 그 자리에서 저의 초상화 작품을 들고 대통령에게 설명했습니다. 놀라웠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나를 이렇게 높이 인정해주는구나!"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대표적 인물로 자리 잡은 이용주 작가는 올해 호찌민-경주 세계문화엑스포 '한국-베트남 미술교류전'에 참가한다. 주최 측은 전시관 2개 관을 통째로 빌려 이용주 단독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다. 또 내년을 목표로 파리와 두바이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그림과 자수의 만남

1957년 서울 후암동에서 태어난 이용주 작가의 부친은 북한 흥남에서 해방 후 월남했고 상이군인이었다.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꾸리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이 작가가 철도고등학교에 들어간 이유는 단지 학비가 '공짜'였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솜씨도 뛰어났다. 아르바이트로 카드를 만들어 길거리와 여고 앞에서 팔기도 했다.

"고 1 겨울방학 때였습니다. 할머니 친구 중 한 분이 수를 놓고 계셨는데, 저 보고 그림을 잘 그리니 자수본을 그려오라고 했습니다. 그 할머니는 그림이 좋다며 쌀을 팔아주셨고 저는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자수도 배웠습니다. 일종의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한 셈입니다."

이후 자수와의 인연은 완전히 끊기는 듯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예정대로 철도청에 입사해 무선관리업무를 했고, 국가기간통신망 통합 정책에 따라 한국통신(현 KT)으로 옮겨 1995년 12월까지 근무했다.

희망퇴직을 한 이유는 새로운 나와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였다. 1991년 등단을 거쳐 1993년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됐고, 비록 아마추어 미술가였지만 한중문화교류전에 초대작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학과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비전공자'라는 딱지가 늘 붙어다녔다. 어떻게 하면 이 편견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득 할머니 친구한테 배운 자수를 이용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수의 결로 홀로그램 효과를 나타낼 수 있으면 생동감 있는 표현이 가능하고, 어쩌면 이를 통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그리고 회사를 접고 자수공방을 차렸습니다."

◆나만의 세계를 찾아서!

"서울 용답동에 공방을 차리고, 직원 17명을 채용했습니다. 3년이 지나니까 조그마한 집 한 채가 날아갔습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한복 패치수 작업도 하고,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북한에 하청을 주기도 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수놓는 기술은 뛰어난데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가 없어 정말 골칫거리였습니다. 납품기한도 멋대로 무시하고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안 된다, 안 된다'는 말 뿐이었습니다."

2000년부터 수준 높은 작품이 나오기 시작하자 황당한 일을 많이 겪었다. 어느 날 기자라는 사람이 취재를 하고 간 뒤, 직원 17명 중 13명이 출근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 기모노 수놓는 사람이 기자를 사칭하고 영업장을 살핀 후 직원들을 빼간 것이었다. 컴퓨터 자수로 대부분의 일을 하고 간단한 수작업으로 작품을 마무리한 뒤 '이용주 작'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팔자는 일본인의 달콤한(?) 제안도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꽤 유명한 사람의 아들이 와서, 미국 유명 영화배우들의 초상화를 자수로 만들어 돈 많은 유대인들에게 팔면 큰돈을 벌 수 있다며 동업을 제의했는데요. 1년 동안 작업을 해 20여 점을 주니까, 그만 비행기를 타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기당한 셈이죠."

이용주의 작품, 특히 초상화의 우수성은 이미 입소문을 통해 상당히 알려졌다. 2008년 서울시의 의뢰로 서울국제경제자문단총회에 참석한 국빈급들의 초상화 20여 점을 제작하기도 했고, 많은 국제 인사들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2008년 3월 타이타닉 노래를 부른 샐린디온이 한국 공연을 왔습니다. 샐린디온의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선물을 받은 샐린디온이 작품을 보고 감동해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게 나중에 언론에 보도되면서 제 작품이 대중적 주목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또 샐린디온의 초청으로 저와 함께 간 27명이 샐린디온의 가족과 나란히 앉아서 공연을 무료로 관람했습니다. 감격스러웠죠. 세계적 유명인사가 학벌이 아닌 작품으로 나를 인정해주는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혼자수 초상화에 대한 주문은 이어졌다. 외국 대사가 자국의 대통령 초상화를 주문하기도 했고, 조계종 진제 종정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초상작품을 요청했다. 국내외 대기업 총수를 비롯해 요르단 국왕, 반기문 전 UN사무총장, 러시아 정교회 대주교, 그리스 정교회 대주교, 제시 잭슨 목사 등 국내외 유명인사들이 이용주의 초상화 작품을 소장했다.

2014년에는 터키 이스탄불시로부터 루멜리 요새, 성 소피아 성당, 베이레르베이 궁전, 블루 모스크, 베야즛광장 등 이스탄불의 대표적 문화유산 24곳에 대한 작품을 의뢰받았다. 이 작품들의 이스탄불 전시(납품)에 앞서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전시회가 열렸는데 8일간 5만5천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 경주 전시회 사상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다.

◆천 년 뒤를 준비한다?

경주 혼자수미술관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92개 작품이 원작 크기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또 초'중'고 미술 교과서 17종이 미술관 사무실에 비치되어 있다.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394점의 세계명화 가운데 50% 정도가 혼자수로 재현되어 있다. 나머지 200여 점도 재현 작업을 마무리할 각오다.

"미술은 공간과 색을 배우는 것입니다. 공간과 색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원화를 실물 그대로 봐야 합니다. 스케치는 공간 구성이고, 색칠은 관찰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에서 패션과 스타일, 건축, 디자인 등이 나옵니다. 관광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미술품을 보러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과서에 나오는 세계명화는 24개국 168개 미술관, 36명의 개인 소장가에 의해 보관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명화들을 한자리에서 원작 크기 그대로 볼 수 있도록 재창조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방작은 원작보다 못하다는 편견이 있다. 정말 그럴까? 고흐의 작품 중 화첩을 보고 모방해 그린 것이 원작보다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 있다. 전주 경기전 태조 어진은 150년 전에 다시 그린 것이다. 463년이 지나 보수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원화가 훼손된 탓이다. 그런데도 국보 3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조 양식을 그대로 갖고 있다'는 점을 높게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일본인은 이용주 작가가 재현한 클림트의 작품을 억대에 흔쾌히 구입했다.

"유화, 동양화, 먹 등에 사용되는 고형제인 테라핀과 아교는 500년을 버티기 어렵습니다. 세계적 명화들이 수백 년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순천 선암사 대각국사 의천의 천 년이 지난 가사 자수는 그대로 있습니다. 중국에는 2천100년 전의 자수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제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옻칠기법을 적용하면 자수의 수명은 3천 년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이용주 작가는 천 년이 지난 뒤 사라진 세계의 명화들을 보기 위해 전 세계인이 한국을 찾는 그런 날을 꿈꾼다고 했다. 이 작가에게는 또 다른 소망이 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고려 불화 160점(국내 20여 점 포함)을 혼자수로 재현해 이 땅에 남기고 싶다는 바람이다.

"그동안의 혹독한 작업으로 눈과 건강을 많이 해쳤습니다. 솔직히 언제까지 작업을 계속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하려고 합니다."

그는 오늘을 사는 청년들에게 '사흘을 안 자고 사흘을 굶어도 하고 싶은 것을 하라' '좋은 스승을 만나라' '생각을 바꿔라' 이 3가지를 꼭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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