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34>-엄창석

서석림이 국채를 갚아야 한다고 큰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계승은 광문사를 나왔다. 문회가 시작될 때와 다르게 성 안에는 수비대들이 한층 늘어난 것 같았다. 계승은 곧장 서문을 빠져나와 농루로 향했다.

농루 마당에는 연기와 김이 자옥했다. 아낙들과 기녀들이 가마솥에 불을 넣고, 돼지고기와 산적, 부침개, 떡, 갖가지 젓갈 반찬을 준비하느라 한창이었다. 방마다 놓여 있는 상 위는 아직 비어 있었다.

"곧 문회가 끝나요. 상에 음식을 올리랍니다. 참, 금릉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계승은 행수로 보이는 나이든 기녀에게 염농산의 말을 전하고, 마치 긴요하다는 듯이 다급한 말투로 애란이 있는 곳을 물었다. 김치를 가지러 뒤안에 갔다고 다른 기녀가 일러주었다.

입구자(口) 본채에서 북향으로 나 있는 후원엔 잎이 떨어진 연산홍과 개나리가 담장 밑에 촘촘했다. 백일홍, 매화나무가 본채의 뒷처마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자라고 있어서 봄이 되면 후원이 퍽 아름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땅에 묻은 독에서 김치를 꺼내고 있는 애란이 보였다. 김칫독 예닐곱 개가 두 줄로 나란히 묻혀 있었다. 후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실 줄 알았어요."

애란이 대야에 포기김치를 담으며 슬쩍 곁눈질을 했다. 그녀의 청아한 음성이 계승의 옷깃을 파고들었다.

"염농산 아주머니가 가보라고 하셨어."

계승은 비굴하게 입을 뗐다. 그는 어색함을 감추려고 자신이 온 게 광문사의 업무라는 듯 "내가 할게. 우리 손님들이 드실 거잖아."라고 말했다. 애란이 비켜 앉았다. 김칫독은 꽤나 깊어서 거의 머리까지 집어넣어야 했다.

"저를 보고 싶었나요?"

엎드린 그의 등 뒤에서 애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승은 김치를 거머잡고 독에서 머리를 빼내다가 바투 앉은 애란의 치마 속 살결에 눈이 찔렸다.

"그래."

"얼마나 보고 싶었나요?"

계승은 김치를 대야에 놓고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7년 동안 그녀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애란이 잡힌 손을 빼내지 않고 물었다.

"부산에 유곽이 있다죠? 거기 여자들보다 내가 더 예쁜가요? 빨리 말해줘요."

애란이 촉촉이 젖은 눈동자로 그를 쏘아보았다. 자신이 여기저기 떠돌다가 마지막으로 부산을 거쳐 대구로 돌아왔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은 듯했다. 계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게는 비할 수 없는 다른 무엇이 있다고 말했고, 그녀는 웃었다. 계승은 독 밑까지 훑어 김치를 꺼냈다. 대야에 가득 담기자 애란이 김치를 안고 안채로 사라졌다.

문회가 폐막되었다. 수백 명 외지인이 한꺼번에 도시를 빠져난 후로 성 안은 오히려 한산해졌다.

광문사는 이전보다 더 분주했다. 서석림과 김광제는 매일 나와 뒷일을 논의했고, 직원들은 밤을 새워, 김광제가 쓴 국채를 갚자는 취지문을 옮겨 적었다. 필사할 취지문은 3백 장이었다. 글씨 솜씨가 모자라는 계승은 필사에 참여하지 못했다. 대신에 먹을 갈거나 취지문을 봉합하여 우편소로 가져갔다. 전국의 각 지역과 신문사, 일본과 미국까지 취지문을 발송했다.

"전국의 모든 동포가 석 달만 담배를 끊으면 국가가 진 빚을 모두 갚을 수 있다는 거요. 그날 현장에서 김광제 사장이 석 달 담뱃값으로 60전을 냈고 추가로 10원을 헌납했어요. 발의한 서 시찰(서석림)께서는 즉석에서 800원을 바쳤죠."

계승은 달성회 회원들에게 문회의 얘기를 전했다.

"2천만 백성이 광문사 손바닥 안에 있는 줄 아나 보지? 누가 광문사 얘길 듣는대? 취지문을 보낸다고 한들 그걸 선비들이나 읽고 부들부들 떨겠지. 글을 읽을 줄 아는 백성은 백 명에 하나뿐이야. 제일 많이 찍는 대한매일신보도 고작 만 부인데 뭘 기대해."

오돌매가 코웃음을 쳤다. 옆에서 다른 이도 비슷한 소리를 했다.

"설령 그랬다 쳐도 우리 같은 장사꾼들에겐 쓸데없는 소리지. 일본 잡상인들이 물러날 리가 없잖아. 그 양반들은 몰라. 우리가 얼마나 일본 날파리 떼들에게 시달리고 있는지. 흥, 나라 빚을 갚자 하면 은행이나 금광쟁이 거부들은 좋아하겠네. 그걸로 또 백성들 등을 후려쳐 먹을 수 있으니까."

거기서 마욱진의 마차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광문사 문회가 열리기 이틀 전에, 달성회로부터 정보를 받은 영천 의병이 급습하려던 마욱진의 마차 소식이었다. 그날 조영하 의진 수십 명이 영천 시티재에서 매복하고 있었는데, 마욱진의 마차가 영천에 이르기도 전에 먼저 다른 화적떼의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서로 몇 차례 총질 끝에 화적들이 도주했고, 대구에서 수비대를 급파했다. 그 일로 마욱진은 하루가 지나 수비대의 호위를 받으며 시티재를 넘었다. 조영하 의진은 정해진 날짜에 마차가 오지 않자 몇 명이 줄어들었고, 남은 의병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도착한 마욱진의 마차를 공격하다가 대구 수비대에 섬멸돼 버렸다는 것이다. 일본은 의병과 화적을 구분하지 않고 토벌했는데 이번엔 진짜 화적이 나타난 셈이었다.

그런 일로 달성회는 분위기가 서늘했다. 가담한 일부만 그 소식을 알았고 다른 이들은 캐묻지 않았으나 뭔가 우울한 낯빛을 서로 나누었다.

광문사는 문회를 마친 후,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았다. 성주와 동래에서 몇 사람만 다녀갔을 뿐이었다. 각 지방과 신문사에 발송한 취지문에도 반응이 없는 듯했다. 신문에 기사조차 실리지 않았다. 형편없이 작은 제국신문이란 곳에 단신기사 한토막이 오른 게 18일이나 지나서였다. 문회가 끝난 후, 아직 헐리지 않은 성문 옆에 취지문을 붙여놓았지만, 한자로 쓰인 김광제의 긴 문장을 읽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리를 맞아 흐물흐물해진 취지문 종이가 뜯겨져 개가 물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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