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모델/다니엘 A. 벨 지음/김기협 옮김/서해문집 펴냄
지난 5월 9일. 촛불이 불러온 장미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41.08%의 득표율로 20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2위와의 득표 격차가 역대 최대였다고는 하지만 그를 지지하지 않았던 유권자도 10명 중 6명이나 된다. 비슷한 결과는 다른 선거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결국 1인 1표 선거민주주의는 참정권의 평등을 보장하지만, 투표 가치의 평등까지 보장해주진 못한다는 다수결의 역설을 뒷받침하는 셈이다. 아울러 과반의 지지를 받고 1인 1표로 뽑힌 한 지도자가 탄핵으로 임기를 마무리하는 최근의 상황은 선거민주주의가 최고 지도자를 뽑는 제일 나은 방법인지 되묻게 한다.
캐나다 출신의 정치철학자 다니엘 A. 벨이 '최선은 아니지만 달리 최선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선거민주주의에 반기를 들었다. 그의 책 '차이나 모델'에서다.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왜 유능한가'라는 부제를 단 그의 책은 제목부터 도전적이다. 출간되자마자 학계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책이다.
정치 지도자와 민주주의를 논하면서 중국을 모델로 삼은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중국의 정치 지도자가 유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이 책이 더 불쾌하게 느껴질 것이다. 저자는 중국의 정치 지도자가 유능하다는 전제에서 그들이 왜 유능한지를 설명한다. 마오쩌둥, 덩샤오핑으로 대표되는 공산당 1당(사실 중국에는 공산당 외에 8개 당이 있다)체제에 비판적인 정당주의자, 또 보통'평등'직접선거에 익숙해져 가는 우리에겐 중국 정치 지도자에 대한 옹호가 버거울 수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중국의 예를 들며 '현능주의'라는 정치 모델을 제시한다. '현능주의'(賢能主義, meritocracy)는 흔히 '능력주의'나 '실력주의'로 번역되지만, 이 경우 'merit'가 뜻하는 '덕성'이 빠진다. 그래서 옮긴이는 어질고 유능하다는 뜻을 강조해 '현능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비슷한 교육을 받고, 정치 참여의 기회가 동등하더라도 모두가 뛰어난 정치 지도자가 될 수는 없다. 저자는 지난 30년간 중국의 정치체제가 현능주의로 다져졌다고 하면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 최고 권좌에 오르는 과정을 예로 든다. 지방 말단 현(縣)급의 자리에서 시작해, 중국 1인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시 주석의 도정(道程)은 중국의 현능주의 정치체제를 대변한다고 말한다.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은 견고한 1당 체제 속에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지난 30년 중국의 안정과 성장도 현능주의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첫 장에서 현능주의를 소개한 저자는 바로 선거민주주의의 네 가지 위험을 제시한다. '다수의 전횡' '소수의 전횡' '투표집단의 전횡' '경쟁적 개인주의자의 전횡'을 설명하면서 선거민주주의의 단점을 부각시킨다. 그는 서양에서 국가 최고지도부를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로 뽑는 제도의 역사가 길지 않다는 점에서 최상의 제도라 단정하기 어렵다고 한다. 또 다른 분야와 달리, 정치 지도자에게 경험과 전문성을 요구하지 않는 제도가 절대적 지지를 받는 점도 근거가 약하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선거민주주의에 대한 맹신과 추종을 거부하면서 현능주의의 장단점을 살펴본다. 장단점이라고 하지만 그의 관점은 단점보다는 장점에 가깝다. 제2장에서는 현능주의 정치체제에서 좋은 지도자를 뽑는 방법을 살펴본다. 지은이는 좋은 정치 지도자가 되려면 도덕적 품성, 사회적 기술, 지적 능력을 갖춰야 한다면서 중국의 현행 제도에도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제3장은 현능주의 정치체제의 단점을 이야기한다. 최고 권력에 대한 견제, 감독 기능이 상대적으로 약한 탓에 통치자가 권력을 남용하고 정치적 위계질서가 굳어질 수 있다고 한다. 체제 정당성을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국 사회에 뿌리깊은 부패 문제와 함께 현능주의의 정치체제가 풀어야 할 숙제로 꼽힌다.
제4장에서 저자는 민주주의와 현능주의의 결합을 시도한다. 우수한 지도자를 뽑는 현능주의와, 국민(인민)이 지도자를 선택하는 민주주의 원리를 합친 세 가지 모델을 검토한다. '똑똑한' 유권자에게 투표권을 더 주는 방식, 민주주의와 현능주의로 중앙 정치기구를 이원화하는 방식이 중국에 적용되기 어렵다면서 현능주의 중앙정부와 민주주의 지방정부로 이뤄진 '민주적 현능주의'를 제안한다. 중국을 세 층위로 나누고 소통 능력이 강조되는 하층부(지방)와 정확한 판단이 요구되는 상층부(중앙), 실험공간인 중간부로 구분하되, 국민투표를 통해 현능주의의 정당성을 보완하자는 것이 골자다.
저자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 '1인 1표'에 물음표를 단다. 정치적 평등을 투표로 실현하는 선거민주주의가 최선이라는 일반적인 믿음을 흔든다. 세 개 층위의 '차이나 모델'이 마오쩌둥 이후 30년간 중국 정치개혁의 근간이 됐다면서 이 모델의 세계적 확장 가능성을 살펴본다.
책은 민주주의 논쟁에 불을 지폈다. 그만큼 저자에 대한 비난도 거세다. 만연한 부패, 반대와 다양성이 허용되지 않는 일당제, 열악한 인권 상황 등 중국의 현실을 모르고 쓴 홍보물이라는 비판이다.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국가별 부패 정도를 수치화해 매년 '부패인식지수'(Corruption Perception Index·CPI)를 발표한다. 첫 조사가 있었던 2001년 장쩌민 주석 집권기였던 중국 정부 부패인식지수는 총 91개 순위 가운데 57위였다. 후진타오 주석의 집권 중반기인 2008년에는 180위 가운데 72위를 기록했다. 저자가 차이나 모델의 모델로 삼은 시진핑 주석체제에서는 어떨까. 2017년 1월 발표한 2016 CPI는 176위 가운데 79위다. 지난해 이 조사에서 대한민국은 52위, 북한은 174위를 기록했다. 단점이 분명한 중국식 현능주의 정치체제의 장점을 어떻게 취할지는 독자의 몫이다. 431쪽, 1만9천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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