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법정에 선 식민지 조선 여성들/소현숙 지음/역사비평사 펴냄
조선시대 여성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이혼할 수 없었다. 한말에 이르러서도 양상은 비슷했다. 이혼 현상 자체는 존재했지만 대체로 소박이나 기처(棄妻) 등 남성이 여성을 버리는 것, 혹은 한 집안이 며느리를 내쫓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이혼 문화는 큰 변화를 겪는다. 이 책은 이혼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가족법의 변화와 여성의 대응 양상을 살펴본다.
◆신여성뿐만 아니라 민며느리도 소송
1912년 3월 일제는 조선민사령을 공포했다. 그러나 일반 민사는 일본 민법을 의용하도록 한 데 반해, 가족과 관련해서는 '조선의 관습'을 따른다는 관습주의를 채택했다. 일제가 판단한 '조선의 관습'에 따르면 여성의 이혼청구는 허용될 수 없었다. 이혼은 칠출삼불거(七出三不去)의 원칙에 따라야 하고, 이혼할 때는 부모나 호주의 동의가 필요하며, 아내(친정 측 포함)는 이혼을 청구할 수 없고, 합의이혼도 성립되지 않았다.
'칠출삼불거'란 부인을 내쫓을 7가지 사항(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아들이 없을 때, 음탕할 때, 질투할 때, 나쁜 병이 있을 때, 말이 많아 가정 화목을 해칠 때, 도둑질했을 때)과 내쫓지 못할 3가지 사항(내보내도 의지할 곳이 없을 때, 함께 부모의 3년 상을 치렀을 때, 전에 가난하였다가 뒤에 부자가 되었을 때)을 말한다.
상황이 이러니 여성이 원해서 이루어지는 이혼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1910년대 여성의 이혼청구는 많았고, 관습과 현실의 괴리가 크자 조선총독부는 1922년 조선민사령 2차 개정을 통해 기존의 '칠출'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 민법의 규정에 따라 여성도 이혼청구가 가능하도록 했다.
당시 일본 민법의 이혼 원인은 ▷배우자의 중혼 ▷아내의 간통 ▷남편이 간음죄로 형에 처했을 때 ▷배우자가 위조, 절도, 강도 등으로 형에 처했을 때 ▷배우자의 학대'모욕 ▷배우자의 악의적 유기 ▷배우자 직계존속의 학대'모욕 ▷배우자가 상대 직계존속 학대'모욕 ▷3년 이상 생사가 분명치 않을 때 등이었다.
당시 이혼은 이른바 '신여성'으로 불리는 엘리트층 여성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가난한 여성, 어린 민며느리도 소송을 제기했다. 1910년대 이혼소송 청구자의 90% 이상이 여성이었다.
◆남편에 대한 배신에서 '개성의 자각'으로
1910년대 이전까지 조선사회에서 여성의 이혼 요구는 '남편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됐다. 그러나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를 거치면서 여성의 이혼청구는 '개성의 자각'으로 평가되기 시작했고, 이혼을 긍정하는 분위기도 다소간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20, 1930년대 유행한 '자유이혼'은 신지식층 남성의 '본처 버리기'로 귀결되었고, '구여성'은 이혼을 강요당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부모의 강압에 조혼한 신지식층 남성들은 '자유연애'의 붐을 타고 봉건적인 결혼풍습을 비판하면서 '자유이혼'을 실행에 옮겼다.
여성들은 본처로서 지위를 지키고 자신의 이해를 옹호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특히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남편에게 부양료의 책임을 묻거나 이혼무효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남편에게 위자료를 청구하며 이혼소송을 먼저 제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한 남성과 여성의 가정에서도 파탄이 일어났다. 부모로부터 독립한 자유의지에 따른 결혼이었으나 실제 생활은 이상과 달랐다. 여성해방을 부르짖는 신남성들도 실제 가정생활에서는 가부장의 권력을 누리려 했고 아내의 순종과 복종을 기대했다. 신지식층 남성과 신여성의 이혼 문제는 결혼생활의 권력배분을 둘러싸고 발생했다.
◆축첩'사실상의 중혼에 대한 비판 확산
한말에 축첩폐지론이 등장하고, 1915년 첩의 입적신고를 금함으로써 법률상 첩의 지위는 부정되었다. 그러나 축첩 풍습은 여전했고, 일제는 본토에서와 달리 식민지 관습을 존중한다며 축첩을 이혼사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간통죄 역시 여성에게만 적용됐고, 남성에게는 실질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의 축첩과 사실상의 중혼, 간통에 대한 이중적 잣대 등에 대한 비판이 점점 고조되었고, 여성의 태도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덕(婦德)을 되새기며 남편의 외도를 인정하거나 인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법정소송으로 나아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거나, 부양의 의무를 주장하거나, 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사례가 많지는 않으나 남편에 대한 아내의 위자료 청구소송은 거의 대부분 원고에게 유리하게 판결났다.
◆여성들, 가정폭력 법으로 해결 시도
당시 남편이나 시집 식구가 아내(며느리)에게 폭행을 자행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아내나 며느리에 대한 정신적'신체적 학대와 모욕은 가출이나 방화, 자살, 살해 등 극단적인 형태의 저항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이를 법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 남편과 시부모의 가혹행위를 문제 삼고 이혼을 제기하며 처벌을 요구했다.
아내가 남편을 고소하는 것에 대해 세간의 비난도 만만치 않았다. 남편이 설혹 구타를 했다고 하더라도 아내가 남편을 고소해 처벌받게 하는 것을 '잔학한 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것이다. 법 집행 당국도 웬만하면 '좋은 게 좋다'며 화해를 권하거나 '집안일'이라며 기소를 유예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법정투쟁은 당시까지 가부장에게 폭넓고 관대하게 허용되던 사적 형벌권을 제한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많은 소송이 취하나 기각으로 귀결되었지만, 끊임없는 소송전은 결국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폭력의 범위를 재설정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혼 후 생존과 자존의 길 찾기
이혼한 여성의 삶은 참담했다. 이혼으로 남녀 모두 새로운 삶과 맞닥뜨리게 되지만 이전 삶과 단절 정도는 여성이 훨씬 컸다. 남성은 이혼해도 그다지 불명예랄 것이 없었고, 생활형편도 이전과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그러나 여성은 이혼으로 사회적 낙인이 찍혔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혼 소송으로 부양료나 위자료를 얻어내는 여성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의 여성은 이혼과 동시에 무일푼으로 집을 떠나야 했다.
1920, 1930년대 여성에게는 친권이나 재산분할권이 없었다. 노동시장 역시 성차별적인 요소가 많아 이혼한 여성은 생활고에 직면하기 일쑤였다. 친정에 의탁하기 어려운 여성 중에는 재혼이나 첩살이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결혼생활의 끔찍한 고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여성들은 재혼을 선택하기보다는 공장 노동자, 행상, 남의 집 어멈, 유치원 보모 등 노동을 통해 자활의 길을 모색했다.
이혼한 여성이 상업활동을 통해 크게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는 성차별적이고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해야 했다. 그럼에도 타인에게 의탁하지 않고 자립을 위해 노력했던 것은 생존 문제와 함께 자존을 향한 욕망이 강했기 때문이다.
▷지은이 소현숙은 한양대에서 식민지 시기 이혼제도의 변화를 주제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근현대가족사, 법사회사, 일상사, 사회사, 젠더사, 마이너리티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로 있다.
552쪽, 3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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