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하면 에펠탑, 런던 하면 타워 브리지를 떠올리듯 베를린 하면 떠올리게 되는 것이 브란덴부르크 문이다. 독일의 국가적 명예를 상징하는 이 문 위에는 사두마차를 탄 평화의 여신상이 세워져 있고 이를 콰드리가라 부른다. 국가의 개선문하고도 그 정점에 있으니 콰드리가야말로 독일의 국가적 자존심을 보여주는 표상인 셈이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건립한 이 평화의 문은 이름과 다르게 여러 차례 수모를 겪었다. 우선 1791년 이 문이 완공되자마자 첫 개선식의 주인공이 되었던 사람은 프로이센군을 패퇴시킨 나폴레옹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은 파리로 돌아가는 길에 콰드리가를 통째로 떼어내서 가져가 버렸다. 독일인들의 입장에서는 프랑스로부터 씻지 못할 능욕을 당한 것이다.
국가적 자존심을 짓밟힌 분함이 커서였을까,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프로이센군은 파리를 점령한 후 콰드리가를 베를린으로 다시 가져오면서 콰드리가의 원래 주인공이었던 평화의 여신을 떼어내고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를 세우게 된다.
평화가 아니라 승리를 염원하게 된 프로이센의 복수는 단지 여신상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았다. 1870년에 발발한 보불 전쟁 기간 중에 프로이센은 파리를 포위하는데, 이 포위 작전이 어찌나 지독했던지 파리 시내에 먹을거리가 바닥나서 급기야 파리 시민들이 동물원의 동물들까지 싹 다 잡아먹어 버리는 대혼란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후로 프랑스와 독일은 내내 앙숙 중의 앙숙, 철천지원수였다. 보불 전쟁의 패전으로 알자스-로렌 지방을 빼앗기고 50억프랑의 막대한 배상금을 물었던 프랑스는 1차 대전의 승리와 함께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고 200억마르크의 배상금을 도로 물렸다.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로 가난과 패배감 속에 절치부심하던 독일은 2차 대전 초기 섬광 같은 돌격전으로 프랑스를 점령한다. 승리에 도취된 점령군 독일은 1차 대전에서 무릎을 꿇었던 콩피에뉴 숲으로 프랑스 대표들을 불러내어 휴전 조약을 맺음으로써 프랑스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칼이 칼을 부르고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우리가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시간이 35년이고, 남북 간의 전쟁과 냉전으로 고통을 받은 시간이 67년인데, 독일과 프랑스는 그 두 배가 넘는 140년 이상을 원수로 살았다.
이 악순환의 사슬을 끊어내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이 양국이 공유하는 그리스도교 정신이었다.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그리스도교의 보편적인 인간애를 지켜내야 한다는 공감대가 무르익어 갈 무렵, 두 나라의 정상이 한자리에 모인다. 1962년 7월 8일, 랭스대성당에서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과 독일 총리 콘라드 아데나워가 함께 미사에 참석한 것이다. 이들은 상호 복수를 거듭해오던 두 나라 사이의 적대감을 그리스도교 신앙인다운 화해의 정신으로 치유하기를 함께 기도했고, 이 역사적인 사건을 석판에 새겨 성당 정문 바닥에 남겼다. "아데나워와 나는 대성당에서 화해를 맹세했다. 1962년 7월 8일 주일 11시 02분". 이날의 미사는 분 단위로 기록을 남길 정도로 역사적인 화해의 계기였던 것이다.
이날로부터 정확하게 55년이 지난 2017년 7월 8일, 마침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이 독일 땅에서 정상외교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대통령께서 디모테오라는 세례명을 가진 신앙인으로서 치밀한 외교 전략과 함께 화해와 용서의 자세를 잊지 마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북의 미사일 발사로 더욱 경직된 정세 속에서 강온의 전략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외교적, 정치적 능수능란함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 모든 것의 깊은 뿌리에 화해와 용서가 없다면 어찌 평화의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인가. 대통령뿐만 아니라 모든 겨레의 가슴 속에 화해의 정신이 커져 나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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