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책을 낸다는 것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박사. 휴먼앤북스 대표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박사. 휴먼앤북스 대표

출판계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김정현의 『아버지』란 소설에 관련된 이야기다. 이 소설의 저자는 경찰관 출신으로 등단도 하지 않은 무명이었다. 그는 이 소설을 탈고하고 여러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 몇 군데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다가 한 출판사 대표 눈에 들어 드디어 빛을 보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독자들의 열광적 반응에 힘입어 엄청난 주문이 쏟아졌던 것이다. 때는 1997년. 구제금융 사태로 멀쩡한 아버지들의 자살이 이어졌던 바로 그때 이 소설은 시류를 타면서 20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아버지』 원고를 먼저 검토했다가 퇴짜를 놓았던 출판사 대표들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는 후문도 있다.

대형 출판사의 경우 투고 원고를 검토하는 편집자가 따로 있지만, 대부분의 소규모 출판사들은 대표가 직접 투고 원고를 검토한다. 투고 원고는 한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소설이 대부분이었다. 문학상에 응모했다가 낙선한 작품을 여러 출판사에 투고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문학작품 외에도 여러 분야의 원고들이 투고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투고되는 원고가 좀 알려진 출판사마다 일주일에 수십 편에 이를 정도로 많아졌다.

원고지에 직접 원고를 썼던 시대의 투고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여러 편을 필사하기가 어려워 채택되지 않으면 투고자가 출판사를 찾아가 원고를 돌려받기도 했다. 복사가 대중화되면서는 이런 경우는 없어졌지만, 그래도 여러 출판사에 동시에 투고하는 일은 물리적으로 번거로웠다. 요즘에는 메일로 투고하기 때문에 수십 개의 출판사에 동시다발적으로 투고한다.

시류에 편승한 아이디어 상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가 많아지자, 기획 저자들도 많이 등장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수천 권의 비슷비슷한 책을 주마간산으로 독파하여, 아이디어 상품기획서(출간기획서)를 출판사에 메일로 보내고, 그 기획이 채택되면 단시간 내에 전력투구하여 급조된 원고를 출간한다. 이렇게 하여 혹 운이 좋으면 몇 만권이 팔린 베스트셀러 저자가 되는 경우도 가끔 있다. 이런 기획 저자들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약간의 유명세를 활용해 이른바 '책 쓰기 학원'이나 '책 쓰기 특강'을 개설해 수강생을 모집하여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한다. 이 노하우는 주로 '출판사를 유혹하는 방법'이다. 주식 투자에 좀 성공했다고 주식 학원을 차려 소액 투자자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이런 책 쓰기 스쿨에서 노하우를 배운 예비 저자들의 수많은 기획이 출판사의 메일을 어지럽힌다.

"저의 원고를 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출간기획서 검토를 정중히 부탁합니다. 이 책은 최소 10만 부 이상 판매될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한 서두로 보내온 기획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부자되기류. 재테크 혹은 재테크를 위한 삶의 자세를 다루는 책이고 최근에는 시(時)테크도 많다. 둘째 '괜찮아'류. 덕담과 위로의 책들이다. 셋째 성공담이다. 저자가 아직 성공하지 않았으므로 성공한 사람, 이를테면 스티브 잡스나 이건희를 다룬다. 넷째 여행서다. 백두대간을 종주했다거나 스페인 산티아고를 순례했다는 내용 등등.

출판사 대표들은 아침마다 메일을 열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투고자들의 스승은 아마도 끊임없이 두드리면 언젠가는 열릴 것이라고 설파한 모양이다. 조금씩 기획을 달리해서 연속적으로 투고하기에, 투고 기획의 대부분은 비슷하다. 책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기획서를 쓰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셈인데 그들의 스승도 모르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책은 글의 총화이고, 자신의 인생이라는 점이다.

인생을 걸어야 좋은 책 한 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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