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뇌전증(간질)이다."
무슨 말인가. 나는 아무런 말도 듣지 않은 것 같았다. 느닷없이 바로 며칠 전 일만 맥없이 떠올랐다. 시내에 다녀오던 길에 버스에서 생긴 일이었다. 차가 출발하자 퉁퉁하게 부은 듯한 몸집의 어느 할머니가 흔들리는 차 안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승객을 향해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간질병 환잡니다. 도와주이소."
나는 너무 큰 고함 소리에 놀라고 그 용기에 먼저 놀랐다. 할머니는 다시 말했다.
"제때에 병원에도 못 간다 아입니꺼. 적선하이소."
구걸하는 노인의 한마디가 강하게 뇌리에 박혀 버렸다. 그날 저녁 나는 무심코 강우 씨에게 할머니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그 할머니 진짜 간질병 환자 맞을까? 요새는 구걸도 그런 식으로 해야 먹히나 봐 그치?"
강우 씨는 조용한 어조로
"그라덩가베." (그리하던가 보네)
하고 짤막하게 말했었다.
일요일이었던 바로 어제 인사드린 집안 어른들 말씀도 생생히 떠올랐다. 무슨 의도인지 면전에서 되물을 수도 없는 말뿐이었다.
"새 애기야, 큰 시동생 하나는 불쌍한 줄 알고 돌봐주라 으예이?"
"차려놓은 밥상도 숟가락을 집어줘야 하는 사람 아이가."
"어쩌겠노. 세상에나 니가 거두어야 하지 않겠나."
찾아뵙는 족족 연로한 집안 어르신들이 혀를 차며 하시는 이해 불가한 말이었다. 나는 몰랐다.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싸라기 반 톨만큼이라도 어림짐작을 하거나 종잡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멍하니 앉아서 언니가 안고 있는 고양이를 뜻 없이 바라보았다. 이어지는 언니 말로는 그 병은 잘 먹고 편하게 지내야만 호조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제 생각해보면, 가슴에 대고 대못이라도 박는 듯한 이야기의 골자는 부모도 여인의 손길도 없는 집안에 시집온 나에게 내리는 의무 인계 내지는 일종의 선포와도 같은 지상명령이었다. 거역할 수 없는 하늘의 뜻 상명하복이었다. 행자 언니의 표정은 적진에 포탄을 투척한 전장의 용사인 듯 사뭇 비장했다.
그날 밤. 우리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큰 시동생의 와병 사정을 전해 듣고도 발설해서는 안 될 비밀을 알아버린 사람처럼 내 놀란 가슴 속으로만 밀어 넣고 밀봉해버렸던 것이다. 그 일에 대해서만은 작정하고 절대 침묵했다. 그이가 나를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볼 것도 마뜩잖았다. 친정에는 영영 비밀에 부쳤다. 만일 결혼 전 강우 씨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나는 아픈 형제가 있다는 이유만을 빌미로 내가 선택한 사람으로부터 돌아서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스스로 용납할 위인은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와병 사실을 알고 결혼한 것과 결혼 후 알게 된 것에 대한 차이는 분명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길은 외길이었다. 나의 침묵으로 평화로운 신혼의 나날이 흘러가는 늦봄이었다.
그 후 강우 씨와 내가 삼 년여 동안의 타지방 생활을 접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올 때는 두 딸을 안고 왔다. 그동안 큰 시동생 재우 삼촌은 행자 언니 시어른(건넌방에서 그르렁그르렁 해수병이 심한 기침을 하던)의 주선으로 단양에 있는 절에서 지내다 돌아왔고 민우 삼촌은 군 복무를 마쳤다. 강우 씨를 구심점으로 삼 형제가 부산에 다시 모여 살게 된 것이다.
강우 씨는 늘 귀가 시간이 늦었다. 통금 직전이 퇴근 시간이었다. 재우 삼촌은 외출하는 일이 거의 없이 집안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 신문을 펼치고 한자를 따라 써보거나 스케치북에 인물화 또는 풍경화를 그리고 노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그는 병에 대한 두려움과 실생활에서 느끼는 불편과 불만 그리고 병약한 인간이라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직업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응당히 그럴 수 있다는 속내였지만 대인관계에서의 소외감과 꼬리처럼 따라붙는 우울감을 떨쳐 낼 만한 활력소를 찾지 못했다. 그의 삶 자체가 이미 늪처럼 침체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가 점차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고정되었다. 밥상 위의 숟가락도 집어주어야 한다는 집안 어르신의 표현은 절묘했다. 이를테면 소소한 일마저 타인의 손에 의지하고 살아왔다는 말씀을 절감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가 안고 있는 '할 수 없다'는 부정의 낙인은 피를 나눈 혈육의 무조건적 사랑의 폐해였다. 적어도 나의 생각은 그러했다. 성장기부터 현재까지 주변의 견고 면밀한 옹호와 맹목적인 두둔이, 되레 그가 무겁게 짊어지고 가야 하는 무능력의 굴레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굳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교육과 훈련만 잘 받았더라면 하는 때늦은 안타까움이 나날이 깊어져도 부질없는 일이었다.
선하기 이를 데 없는 심성의 미남자 민우 삼촌은 직장을 구하러 다녔으나 잘 되지 않았고 그때그때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었다. 그는 재우 형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안타깝게 여기고 애달파 했으나 거기까지가 능력의 한계였다. 재우 삼촌은 점점 안으로 웅크리며 정신적으로 고립되었다. 누구에게인지 모를 분노로 가득 차서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폭군이 되기도 하고 어린이가 되기도 하였다. 일상적인 대화에도 곧잘 트러블이 생겼다. 강우 씨는 (표면적으로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고 민우 삼촌과 나는 재우 삼촌의 화를 건드리지 않으려고만 할 뿐 그를 위한 어떤 의견도 대책도 내세우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불행은 그것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더욱 모질고 혹독하게 달려드는 맹수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느닷없이 재우 삼촌에게 또 다른 병마가 들이닥쳤다. 하루아침에 보행이 불가능한 하반신 마비의 고통과 싸우게 된 것이다. 병명을 알아내지도 못한 종합병원 담당의는 예후를 가늠할 수 없다며 퇴원을 종용했다. 희망도 없이 퇴원한 삼촌은 실내 화장실 출입이 불가능한 중증 환자로 방 안에서 용변을 보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온종일 방에 앉거나 누워서 관세음보살만을 불렀다. 주방과 문 하나 사이로 붙어 있는 그의 방에서는 저물도록 관세음보살이 끊이지 않았다.
"올케야, 인생이 불쌍타. 큰 병원에서도 원인을 모른다니 우짜겠노. 우야든동 맛있는 거나 마이 해주라."
행자 언니는 한숨지었다. 그러나 부엌으로 살그머니 나를 찾아온 언니의 친구는 귀엣말로 소곤댔다.
"쪼금씩 주레이. 마이 묵으면 마이 싼다 아이가. 자네가 너무 힘들어 이 노릇을 어이 하겠노."
맺고 끊기가 불편한 성격의 나는 그 말을 수용할 만큼 영악하거나 냉철한 사람은 되지 못했다. 온전히 내게만 의존하는 사람에게 어찌 먹을 것을 아끼랴 싶었다. 당연히 환자는 잘 먹는 것이 우선이라 여겼고 실제로 그가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음식만큼은 아끼지 않고 거두어 먹였다.
※매일시니어문학상은
전국 신문사 최초로 매일신문이 제정해 운영하는 어르신들을 위한 문학상 공모전입니다. 만 65세 이상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으며, 공모 부문은 논픽션, 시, 수필 등 3개 부문입니다. 대상 1명 500만원, 최우수상 3명 각 300만원, 우수상 15명 각 100만원 등 총상금은 4천100만원입니다. 주제는 제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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