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어르신 수상(隨想)] 가장 큰 효도

상큼한 라일락 향기가 보랏빛 꽃잎을 타고 내려와 코끝을 간질이는 따사로운 봄이면 나는 계절병을 앓는다. 아련한 추억 속에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해진 그 옛날로 추억여행을 떠난다.

지금으로부터 53년 전 나는 꿈에 그리던 여자대학에 입학을 했다. 마땅히 거처가 없었던 나는 기숙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바닷가 마산에서 올라간 시골뜨기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놀랍기만 했다. 신비감마저 느껴지는 교정엔 개나리 목련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학교 건물 맨 뒤에 기숙사가 있었고, 배정받은 방은 418호였다. 언니 세 명과 나, 이렇게 네 명이 한 방을 사용했다. 침대 넷, 사물함, 책상이 각각 네 개씩 있는 방은 꽤 넓었다.

창밖으로는 학교 전경이 환하게 보이고, 달빛이 밝은 밤이면 불을 끄고 그리운 부모님께 울며 편지를 쓰기도 했다. 언니들은 제일 하급생인 나에게는 친절했지만, 자기들끼리는 곧잘 다투었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면회가 허락되고 외출도 가능했다. 이미 남자 친구가 있었던 3학년 언니는 면회 왔다는 방송이 나오면 우선 나를 내려 보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오면 외출하기 위해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언니는 육사생도를 좋아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밤마다 부모님이 그리워 울기도 많이 했다. 차츰 기숙사 생활에 적응을 하면서 재미있는 일도 많이 있었다.

한번은 시골에서 보내온 오징어 한 축을 고추장에 찍어 점호를 마친 늦은 밤에 다 먹어 버렸다. 이튿날 우리는 모두 배가 아파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기숙사 주방에 있는 쌀과 팥을 훔쳐 떡을 해서 같은 층 식구들과 나누어 먹은 적도 있었다. 다행히 경비 아저씨에게 들키진 않았지만 간 큰 언니들 덕에 막내인 나는 얼마나 가슴이 콩닥거렸는지 모른다.

시대적으로 그 당시는 한일협정이 있던 때여서 학생들의 데모가 심했다. 경찰에 쫓기던 남학생들이 우리 학교로 숨어들었고, 경찰은 최루탄을 계속 쏘아댔다. 군것질하러 외출하던 우리는 최루가스 때문에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다.

그러나 면회 시간에만 남학생 구경을 하던 우리로서는 남학생들이 반갑기까지 했다.

사감 선생님은 'B사감과 러브레터'에 나오는 사감만큼 무섭지는 않았지만 아주 엄격한 분이었다. 저녁 점호시간 이후에는 외출이 금지되었고, 규칙을 어기면 퇴사를 당해야 했다.

기숙사에 남자가 출입하는 일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단, 1년에 한 번 신입생이 입사하는 날만큼은 예외였다.

아버지께선 생전에 늘 말씀하셨다. "금남의 집인 여자대학 기숙사 침대에 누워 본 사람은 나밖에 없을걸~ 우리 딸 잘 둔 덕분이지."

내가 아버지 생전에 한 가장 큰 효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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