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사등이 오돌매가 밤중에 광문사로 찾아온 것은 2월 중순이었다.
계승이 아궁이 앞에 앉아 군불을 때면서 애란에게 보낼 편지를 읽고 있을 때였다. 문회가 있던 날 잠시 만났지만 더 사무치게 그립다고, 광문사에 신문 사러 언제 오느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전달할 요령이 없었다. 농루까지는 한달음에 갈 수 있는 거리지만 그 길은 염소의 창자 속과 다름없었다. 그녀가 어찌 생각할지, 대문 앞에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염농산이나 다른 기녀들이 흉보지 않을지. 계승은 서석림 댁의 심부름꾼 아이에게 돈을 몇 푼 주어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어제도 우롱차 봉지를 들고 광문사로 조르르 달려왔다. 그즈음 서석림과 김광제만 아니라 대구 문회 사람들이 날마다 회의실에 모여 일을 논의하고 있어 잔심부름거리가 적지 않았다.
"요새 똥개들이 취지문 벽보를 물고 다니더구만."
오돌매가 계승의 옆으로 다가왔다. 계승은 읽고 있던 편지를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그런 소리 듣기 불편해요."
밤중에 오돌매가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그 일을 재촉하려는 것이겠지.
"우라터질, 광문사 문회 때문에 일이 너무 늦춰졌잖소."
"......"
"간이 콩알만 하나보네. 불 싸지르는 짓은 애들도 할 수 있어."
오돌매가 아궁이에서 불씨를 당겨 필터담배에 붙이며 빈정거렸다.
"겁나지 않소."
계승이 화난 목소리로 입을 뗐다.
"그럼, 당장 이와세 상점으로 달려가시오."
계승은 튀어나온 등을 굽혀서 담배를 빠는 오돌매를 돌아보았다. 곱사등이는 모서리가 삐쭉 튀어나온 돌에다 무명천을 덮어놓은 꼬락서니였다. 피와 감정이 조금도 없는 놈이었다.
"한 됫박들이 석유통을 사놓았어요."
계승이 다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불은 지르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청도 터널 공사장에서 뛰쳐나와 밀양과 양산 등지로 헤매며 다닐 때 풍찬노숙을 했고 초량에서도 매립 공사를 하다 바다에 빠져죽을 뻔한 일도 여러 차례였으니까. 물론 계승은 성을 허무는 것이 대구의 젊은 상인들을 벼랑에 몰게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봄이 되어서. 허문 성곽을 마저 정리하면 대구 상인들은 빠르게 몰락할 것이다. 주요한 거리들은 일인들이 다 차지하겠지. 하지만 그런 앞날보다, 지금 몇 달 간 허물어진 채로 방치된 흉물스런 성곽 안에 자신이 거처하는 이 상황은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마치 숨통을 서서히 죄듯이, 흉물스런 성곽이 가리키는 몰락의 예감과 그 과정을 자신의 눈으로 하나씩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다만, 가슴이 뒤숭숭했다. 위태롭고 불가항력적인 대치 상황의 저 한쪽에, 그녀가 존재했다.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열한 살의 소녀는 불아궁이 같은 이 도시와 무너진 성곽 밑에 깔려 몰락하게 될 대구 상인들보다 더 강렬하게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눈웃음, 낮은 콧등, 긴 눈썹, 십 승(升)으로 곱게 짠 옥양목 치마가 계승의 심장을 어지럽혔다.
"걱정 마시요! 오늘 자정에 이와세 상점으로 갈 거요."
마침내 계승은 오돌매에게 말을 던졌다. 바람이 거꾸로 치는지 아궁이에서 불꽃이 훅 밀려 나왔다. 오돌매가 움찔 뒤로 몸을 젖혔다. 튀어나온 놈의 이마에 땀이 흘렀다. 오돌매가 흰창을 번들거리며 아궁이 안에 침을 뱉었다.
"간단한 일이라니까. 불은 자주 일어나는 거야. 촛불이 넘어지거나 석유통이 잘못 과열돼도 불이 나잖소? 얼마 전에 서울 중국인 거리가 홀랑 타버렸지. 임형이 십자 성모당에 다녔죠? 임형이 대구를 떠난 뒤로, 성모당 제대 위에 켜둔 촛대가 지진으로 넘어져 성모당 전체를 태웠지. 그 자리에 들어선 게 계산성당이야. 불을 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이와세 상점도 그냥 불이 나는 거야. 아무도 지르지 않았어."
곱사등이가 일어났다. 어둠 속으로 마당을 빠르게 걸어가는 모습이 울퉁불통한 돌이 굴러가는 것 같았다.
밤이 깊었다. 계승은 성냥과 칼집이 있는 단도를 주머니에 넣었다. 석유를 채우고 밀랍으로 구멍을 막은 통조림 통을 품에 안고 남문으로 나갔다. 거리는 지독히 고요했고 개 한 마리 다니지 않았다. 기온은 급격히 내려갔다. 바람이 거세게 불지 않은 것이 왠지 다행스러웠다. 어제만 해도 북풍이 몰아쳤다. 그렇다고 바람이 전혀 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계승은 동산 서쪽, 천왕당지 앞까지 내려가서 큰 시장 사잇길로 접어들었다. 큰시장에서 이와세 상점이 있는 북성(北城)으로 가려면 달서교를 통과해야 하지만, 계승은 얼음으로 덮인 폭이 좁은 대구천을 건넜다. 밀랍으로 구멍을 막았는데도 깡통에서 석유냄새가 솔솔 피어올라 코를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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