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울릉도 개척史 '검찰사의 길' 가다] <4>나리동~성인봉~저동

간신히 오른 성인봉, 몇만층 몇만장인지 높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울릉도는 두 차례 큰 폭발로 만들어진 이중 화산이다. 첫 번째 폭발이 해발 300m 지대에 나리동을 포함한 거대한 화구원을 만들었고, 두 번째 폭발로 화구원 내에 알봉이 만들어졌다. 사진 가운데 앞쪽으로 완만하게 솟은 봉우리가 알봉이다. 그 왼쪽으로 평평하게 분지를 이룬 곳이 나리마을, 오른쪽 평지를 이룬 부분이 알봉마을이 있던 곳이다. 멀리 보이는 능선의 가운데 완만한 봉우리를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두 번째 봉우리가 울릉도에서 가장 높은 성인봉, 왼편 끝자락이 천부항이다.
울릉도는 두 차례 큰 폭발로 만들어진 이중 화산이다. 첫 번째 폭발이 해발 300m 지대에 나리동을 포함한 거대한 화구원을 만들었고, 두 번째 폭발로 화구원 내에 알봉이 만들어졌다. 사진 가운데 앞쪽으로 완만하게 솟은 봉우리가 알봉이다. 그 왼쪽으로 평평하게 분지를 이룬 곳이 나리마을, 오른쪽 평지를 이룬 부분이 알봉마을이 있던 곳이다. 멀리 보이는 능선의 가운데 완만한 봉우리를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두 번째 봉우리가 울릉도에서 가장 높은 성인봉, 왼편 끝자락이 천부항이다.
검찰사 일행이 성인봉에서 저동으로 내려올 때 걸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재길에서 내려다본 저동항 모습. 방파제 옆 뾰족하게 솟은 바위가 저동의 랜드마크 촛대바위다.
저동천 상류에 있는 봉래폭포. 높이 30m의 3단 폭포로 울릉도를 대표하는 볼거리 중 하나다.
검찰사 일행이 성인봉에서 저동으로 내려올 때 걸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재길에서 내려다본 저동항 모습. 방파제 옆 뾰족하게 솟은 바위가 저동의 랜드마크 촛대바위다.
저동천 상류에 있는 봉래폭포. 높이 30m의 3단 폭포로 울릉도를 대표하는 볼거리 중 하나다.

가장 높은 봉우리.

날이 희붐하게 새고 있었다. 깜깜한 밤을 가두었던 초막은 밤새 아늑하였다. 중봉에 초막을 친 사람 대부분이 약초를 캔다고 파주 사람 정이호가 말했다. 산신당의 주인 대구 사람 박기수는 중봉에 드는 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만날 수 없었다. 규원은 신당에 들어 제를 올리고 곧바로 산행에 나섰다.

"나으리, 위험하옵니다. 소인이 앞서 길을 낼 것이니 후에 걸으시옵소서."

서 생원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어느 곳에서부터는 비켜 걸었다. 까닭을 물으니 계곡이 급하게 깊어 큰비가 쏟아지면 화를 면할 길이 없다고 했다. 군졸을 시켜 돌을 굴려 보게 하였더니 가히 돌 굴러가는 소리가 끝이 없었다.

"골이 깊다. 안전에 신경 쓸 것이다."

규원의 말이 골짜기 안에서 크게 맴돌았다. 숲이 울창하여 향방을 분간할 수 없었다. 오로지 위로만, 앞으로만 나아가야 함이 옳을 것이었다. 등에 땀이 배고 호흡이 가빴다. 등나무와 칡넝쿨에 의지해 혹은 걷고 혹은 기었다. 오늘의 고생이 어제보다 배는 심하였다.

간신히 다다른 봉우리의 이름을 물으니 성인봉이라 하였다. 몇만층, 몇만장인지 높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성인봉에서 뻗어가는 수십 개의 봉우리 끝은 죽창처럼 날카로웠고, 사방으로 뻗은 능선은 맹렬하였다. 서울을 떠나기 전 임금의 말이 떠올랐다.

"송죽도, 우산도가 울릉도의 옆에 있다 한다. 혹은 우산도라 칭하고 혹은 송죽도라 칭하니 이는 모두 여지승람에 기록된 바이다. 또한 송도, 죽도라고도 칭하여 우산도와 더불어 이 세 개의 섬은 울릉도라 통칭하고 있다. 서로 간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산물은 무엇이 있는지 상세히 기록하여 올리도록 하라."

날이 맑았으므로 섬과 연결된 바다는 천 리 밖까지 훤했다. 바다와 하늘은 아득할 뿐 사방으로 걸리는 것 하나 없었다. 대해(大海) 어디에도 돌 한 주먹, 흙 한 줌도 보이지 않았다. 규원은 생각에 잠겼다. '우산도는 곧 울릉도이며, 우산은 옛 나라 이름인 것을. 송죽도는 작은 섬으로 울릉도와 삼십 리 거리에 있고, 송도 혹은 죽도라고 칭하는 섬이 울릉도의 동쪽에 위치한다고 하는데 송죽도 이외에 따로 송도, 죽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산을 울릉으로 호칭하는 것은 탐라를 제주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전 생원을 따라 동쪽으로 10리쯤 내려가니 큰 나무 곁에 초막 하나가 나타났다. 나뭇가지와 잡풀로 얼기설기 지어 언뜻 보니 짐승의 소굴 같아 보였다.

"나으리, 소인의 움막이옵니다. 누추하오나 여기서 잠시 쉬어가심이 어떠실는지요."

일행들이 모두 크게 욕을 보아 기진맥진하였으므로 전 생원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생원, 어찌 이 깊은 곳에 홀로…."

움막 안으로 규원을 안내하는 전 생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섬에 들어온 지 십여 년이 되었다는 그는 참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먹물이 밴 듯 언행이 항시 무거웠으며 투명하고 간결하였다. 섬의 지리에 능통했으며 섬에서 자라는 것들에 모르는 것이 없었다.

높은 곳에 있어 오르내리는 번거로움이 있겠으나 시끄럽지 않아 살 만할 것이었다. 한 몸 겨우 누일 넓이의 초막은 주인을 닮아 정갈하였다. 마침 때가 되어 여장을 풀고 점심을 들었다. 전 생원과 도척이 내어오는 채소와 약초, 말린 어육이 진귀하였다. 산중에 따로 별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이 별미 중의 별미였다.

"나으리, 이리로 곧장 내려가면 포구가 나올 것입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속히 내려가셔야 합니다. 어둠이 내리면 방향을 잃어 밤새 제자리에서 맴돌 수도 있사옵니다."

내려오는 길은 지극히 위태로웠다. 앞서 걷던 전 생원이 몇 번이나 멈춰 섰다. 바위 앞에 십여 장이 넘는 낭떠러지가 여러 군데 있었다. 간간이 떨어지는 돌이 가히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만하였다. 행로의 고단함이 갑절이었다. 전 생원은 군졸들과 함께 칡넝쿨을 이어 비탈 경사면에 걸었다. 나무와 넝쿨 줄에 의지해 겨우 벼랑 아래에 이르렀는데 맑은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육체와 정신이 쇠진하여 잠시 쉬었다. 계곡을 따라 한참 내려오니 그곳이 저포였다.

박시윤 작가

◆성인봉 올랐으나 독도는 볼 수 없어

독도는 울릉도에서 직선거리로 90㎞ 정도 떨어져 있다. 해발 200m 이상, 동쪽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울릉도 어느 곳에서나 독도를 볼 수 있다.

음력 5월 4일 오전 이규원은 울릉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성인봉(984m)에 올랐다. 정상은 조망이 그리 좋진 않지만 잡목 사이로 사방에 펼쳐진 동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규원은 이날 독도를 보지 못했다.

울릉도에서 독도를 볼 수 있는 날은 1년에 10여 차례 정도다. 청명한 날이 잦은 가을과 겨울에 주로 보인다. 이날은 양력으로 6월 19일이었다. 여름철엔 날씨가 맑더라도 대기 중 습도가 높은 탓에 시계가 좋지 않아 독도를 보기 힘들다. 검찰사가 이날 일기에 '사방을 둘러봐도 한 점의 섬도 보이지 않는다'고 기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날 이후 독도에 관한 더 이상의 조사가 없었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독도를 찾기 위한 항해나 현지에서 만난 이들과 대화를 나눈 흔적 등은 기록에 없다. 이규원이 검찰에 나서기 전 독도에 대해 가졌던 잘못된 정보 탓이었다.

이규원은 울릉도에 들어오기 전 고종과 만난 자리에서 독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고종은 "울릉도 곁에 우산도, 송죽도가 있다. 송죽도는 송도 혹은 죽도로도 불린다"며 이들 세 섬에 대한 각별한 조사를 명했다. 고종이 말한 우산도가 바로 독도였다. 하지만 이규원은 "우산도는 울릉도의 옛 이름"이라며 "울릉도 옆엔 송죽도밖에 없다"고 답했다.

◆독도 조사에 대한 학계의 엇갈린 반응

조선 초기 울릉도는 '무릉(도)', 독도는 '우산(도)'으로 불렸다. '우산과 무릉 두 섬이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고 적은 '세종실록지리지'(1454년)가 대표적인 기록이다. '숙종실록'에 실린 안용복의 기사(1696년)도 이를 뒷받침한다. 안용복은 일본에서 돌아와 체포된 뒤 비변사 심문 때 독도를 '자산도'라고 진술했다. 우산도(于山島)의 우(于)를 자(子)로 잘못 본 결과였다.

반면 일본은 같은 시기 울릉도를 다케시마(죽도)로, 독도를 마쓰시마(송도)로 불렀다. 이후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며 울릉도를 마쓰시마로, 독도를 다케시마로 부르면서 울릉도'독도 이름에 대한 혼선이 빚어졌다.

고종은 '만기요람'(1808년) 등 옛 문헌을 통해 우산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반면, 이규원은 당시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내용을 토대로 '울릉도 주변엔 송죽도(지금의 죽도) 외에 다른 섬(독도)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결국 성인봉에 오르는 것 외에 더 이상의 조사에 나서지 않게 됐다.

이규원은 검찰 후 고종에게 보고한 계초본에 이렇게 썼다. '맑은 날 높이 올라가 멀리 바라보면 천 리를 엿볼 수 있으나 돌 한 주먹 흙 한 줌도 보이지 않으므로, 우산을 울릉이라고 부르는 것은 탐라를 제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학계의 해석도 엇갈린다. 이혜은 동국대 교수는 "'탐라'가 하나의 국가로 인근 섬을 포함하는 것처럼, 이규원은 '우산'을 옛 우산국에 속했던 울릉도와 그 주변 섬을 모두 포함한 이름으로 인지했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부 학자는 "이규원이 울릉도에 다녀온 후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가 울릉도, 죽도, 우산도의 3도로 구성됐음을 확인하게 됐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반면, 이 같은 해석이 지나친 견강부회(牽强附會)란 의견도 만만치 않다. 한 학계 관계자는 "독도에 대한 조사가 부족했던 부분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는 학자가 많다. 당시 울릉도 검찰이 큰 의미가 있다는 데는 공감하지만 과오를 덮으면서까지 맹목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했다. '아픈 역사는 아픈 대로 부족한 부분은 부족한 대로 남겨야 하는 게 바른 역사 인식을 위한 길'이라는 의미다.

◆모시풀 많아 붙여진 이름 저동

이날 오후 일행이 다다른 저포(苧浦)는 울릉읍 저동이다. 이규원은 이날 일기에 저동을 이렇게 기록했다. '저포는 남서쪽으로 터를 잡았고, 동쪽은 소저포, 서쪽은 대저포라고 불렀다. 산록은 완만하고 해안은 널찍했다. 산기슭 안팎으로 모시풀이 빽빽이 나 있어 모시를 짜면 수십 호는 살 만한 것 같았다. 가운데 큰 하천이 있어 끊이지 않고 멀리 흐르니, 이 또한 마을 터를 이루는 자격이 된다고 하겠다.'

저포, 저동이란 이름은 이 일대에 모시풀이 자생한 데서 비롯됐다. '모시 저(苧)' 자를 쓴 한자식 이름이다. 모시개라고도 불렸다. 이규원이 소저포로 기록한 동쪽은 작은모시개, 서쪽 대저포는 큰모시개, 그 가운데는 중간모시개로 불렸다. 지금도 상당수 저동 주민은 '저동1리' 식의 표현보다 큰모시개, 중간모시개, 작은모시개란 이름을 선호한다.

저동은 행정 중심지인 도동과 함께 울릉도에서 가장 큰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저동엔 도동보다 훨씬 넓고 완만한 논밭과 해안이 있었다. 1970, 1980년대를 지나며 대부분 건물이 들어서거나 도로로 바뀌었다고 한다.

저동은 울릉도 어업의 중심지이자 동해안 어업 전진기지다. 1980년 국가사업인 저동항종합개발공사가 마무리되며 대한민국 10대 어업전진기지로 발돋움했다. 이 시기 저동은 오징어가 호황을 누리면서 '개도 천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경기가 좋아 사람들이 몰리면서 저동 인구가 1만 명을 넘어서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저동의 한 담배포가 전국에서 담배 판매 1위를 기록했다는 이야기는 지금껏 회자되고 있다.

이규원이 '큰 하천'으로 묘사한 저동천 상류 물은 울릉 주민의 60% 이상이 사는 울릉읍 지역의 식수원이다. 저동항에서 이 하천을 따라 오르면 울릉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봉래폭포가 숨어 있다. 높이 30m의 3단 폭포로, 매표소에서 20분 거리다. 이곳에서 만난 한 주민이 "봉래폭포는 울릉도의 보배"라며 자랑을 늘어놨다. 수량은 그리 많지 않지만, 나리분지 쪽에서 스며든 빗물이 땅속에 고였다가 솟아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정한 수량을 유지한다고 한다. 울릉도를 대표하는 볼거리 중 하나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