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분권 개헌 논의가 한창이다. '연방제 수준의 분권을 기대'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이 쪼그만 나라에서 무슨 분권이냐'며 회의적인 쪽도 있다.
'분권 강화'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대체로 일사불란했던 시절의 '효율'에 더 큰 점수를 준다. 국민 총화 단결로 고도성장을 이룬 덕분에 이만큼 살게 됐는데, 분권으로 갈가리 찢어지거나, 엉뚱한 길로 빠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분권 강화'에 기대를 거는 쪽에서는 탁월한 지도자의 혜안에 따라 전 국민이 일로매진하는 방식으로 발전하던 시대는 끝났고, 각 지방자치단체와 개인이 각자의 장점과 재능을 발휘할 때,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행 지방자치제를 본격 시행하고(1995년 7월 1일) 22년이 지났지만, 우리나라를 지방분권 사회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지방자치단체가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한정적인데다, 현재 지방정부가 수행하는 일 중에 중앙정부로부터 위임받아 처리하는 업무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예산집행도 마찬가지다.
가령, 박근혜 전 대통령이 기초노령연금 인상을 추진했을 때, 그 인상분의 약 40%를 각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했다. 자치단체마다 사정이 달라서 골목길 정비, 교통안전시설 확충, 쓰레기 수거 확대 등 우선순위가 있음에도, 중앙정부가 시행하는 일의 사업비를 대느라 지자체 사업을 접거나 예산을 깎아야 했다. 잔치는 중앙정부가 벌이는데, 돼지는 지방정부가 잡는 식이다. 영유아보육사업 확대, 학교 전면 무료급식 등도 양상은 비슷했다.
이러나저러나 잡은 고기를 국민이 먹는데, 뭐가 문제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자식 학비를 대기 위해 돼지를 길렀는데, 큰집 어른 팔순잔치에 돼지를 잡으라고 하니 난처한 것이다. 이런 경우는 한두 개가 아니다. 정부가 부동산 경기 활성화를 위해 취득세를 감면하면, 지방자치단체의 세수 감소로 이어지고, 지방자치단체는 목표했던 사업을 접거나 축소해야 한다. 또 일정 액수가 넘는 행사나 신규 투자를 하자면 건건이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상황이 이러니 주민의 요구와 지방공무원의 상상력에 의한 정책 개발은 위축되었고, 중앙에서 지휘, 시달하는 사업에 집중적으로 매달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자치단체마다 '더 시급한 과제'가 있어도 국비를 많이 따기 위해서는 중앙정부가 제시하는 '사업 방향'에 맞춰 사업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방의 손발(예산)과 생각(필요한 정책 개발)까지 묶어 놓은 형국이다.
지방자치 시행 22년이 지났음에도 이런 '관계'가 지속되는 바탕에는 '중앙은 유능'하고 '지방은 무능'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하지만 중앙 공무원과 지방 공무원의 역량 차이는 천부적인 것이 아니다. 중앙 주도 방식하에서 '역량 차이'는 점점 커질 뿐이다. 자기 주도적으로 일할 기회가 없으니 실패할 일이 없고, 실패할 일이 없으니 실패에서 배울 기회조차 없기 때문이다. 초기에 어려움을 겪더라도 각 지자체가 마음껏 역량을 발휘해 한 단계 더 성장하자는 것이 '분권 강화 목소리'의 핵심이다.
'지방분권 강화=살기 좋은 우리 고장'이라는 말은 아니다.
성공한 지자체의 경우 노후 걱정이 없고, 아이들은 신선한 급식을 받을 것이다. 거리와 공원 화장실은 깨끗하고, 길에서 눈이 마주친 시민들은 미소와 목례를 나눌 것이다. 분권 개헌 규모에 따라서는 대구공항 이전 같은 큰 문제도 대구경북인의 뜻과 자력으로 정리할 수 있다.
다른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
공항은커녕 시내버스조차 필요한 만큼 배치하지 못할 수 있다. 거리에는 쓰레기가 뒹굴고, 아이들은 보도블록이 깨진 위험한 길을 따라 등교한다. 시립병원의 의료진 대부분이 해고되고, 남은 의료진은 밀려드는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파김치가 된다. 분권 강화로 주민과 지자체는 폭넓은 자율권을 갖는 동시에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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