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은 시각, 대구 동성로에 있는 인형뽑기방.
잡힐 듯, 말 듯하지만 끝내 잡히지 않는다. 오늘은 1만원으로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 하지만 이놈의 집게발은 오늘따라 더 헐겁기만 하다.
빈손으로 나오는 한 취업준비생에게 말을 걸어봤다. 그는 "학원에서 공부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가끔 인형뽑기방을 들른다. 한 번 오면 5천~1만원 쓴다. 5천원이면 한 끼 식사를 때울 수 있는 돈이지만 아깝지 않다. 인형을 뽑아 올릴 때면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고 했다. 스물일곱 살 남성인 그의 백팩에는 피카추, 도라에몽 인형이 앙증맞게 달려 있다. 그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3년째 하고 있다. 불안하다. '다 큰 청년이 애들처럼 웬 인형뽑기냐'고 혀를 찰지 모르지만, 인형뽑기는 답답한 현실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탈출구다"고 했다.
인형뽑기가 열풍이다. 몇 년 전만 해도 구석진 골목에 소규모로 운영되던 인형뽑기방. 이제는 '젊음의 거리', 동성로를 점령하고 있다. 인형뽑기는 20여 년 전에도 유행했다. 그때는 전자오락실이나, 서점 앞에 한두 대 설치된 게 고작이었다. 요즘은 인형의 품질이 좋아졌다. 인터넷에는 '뽑기 신공'을 공유하는 카페까지 등장했다. 인형뽑기와 관련한 여러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인형뽑기방에 설치된 지폐교환기를 부수고 현금을 훔쳐가는 범행이 잇따르고 있다. 술 취한 여성이 인형뽑기 기계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인형을 잘 뽑는 청소년들은 또래에서 스타로 떠오른다. 이들은 '뽑기왕', '프로뽑기러' 등으로 불린다. 뽑기왕의 가방에는 인형들이 전리품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소설가 우광훈 씨는 대구에서 유명한 뽑기왕이다. 그는 딸을 위해 인형뽑기에 입문했다. 이후 뽑기 카페 회원들과 '뽑기 원정'을 다닐 정도로 마니아가 됐다. 우 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뽑기에 몰두한 2년여 동안 1천만원 정도 썼다. 인형뽑기를 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접했다"고 했다. 그는 뽑기왕을 꿈꾸는 아버지와 그를 곁에서 응원하는 중학생 딸의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 '나의 슈퍼 히어로 뽑기맨'을 출간했다. 이 소설은 제7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인형뽑기는 적은 돈으로 누릴 수 있는 소소한 재미다. 물론 중독이 아니라는 전제 아래 그렇다. 그래서 누군가는 '가난한 여가 활동'이라고 찬양한다.
하지만 인형뽑기방에서 피카추와 밀당을 하는 청년들의 뒷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린다. 청년들이 성취감을 느껴야 할 곳은 인형뽑기방이 아니라, 직장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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