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36>-엄창석

이와세 상점은 허물어진 북쪽 성곽 밖, 철도 사이에 위치했다. 그러니까 성곽 모퉁이에 위태롭게 서 있는 망경루와 우현서루와 이와세 상점이 등거리(等距離)로 삼각형을 띠고 있었다. 이와세 상점 옆으로는 일인들의 주택과 요릿집, 여관, 무역상, 잡화점, 화물취급소 들이 대구 정거장까지 이어졌다.

계승은 아무 일도 아니란 듯 우현서루 앞을 지나 일인 상점 지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외지 학생들이 기숙을 하며 공부하는 우현서루에는 불이 켜진 방들이 더러 있었지만 일인 상점 지역은 캄캄했다. 날짜를 짚어보았다. 음력으로 정월 초엿새니까 달도 뜨지 않을 것이다. 며칠 간 번다하게 이어진 정월 초하룻날의 잔치가 끝나 거리는 여느 때보다 적막하고 피로에 젖어 있었다.

긴 엔가와와 처마 밖으로 돌출된 쯔케쇼인으로 화려하게 구성된 일본인 저택을 몇 채를 지나면 이와세 상점이 나왔다. 나중에 보험으로 업종을 바꾸었지만 이 무렵 이와세는 일본에서 가져온 담배제조 도구와 라이스페이퍼를 팔면서 한편으로는 무역을 했다. 그는 무사시노, 치바 같은 오래된 일본 담배 상회의 이름이 적힌 담배봉지를 일인과 한인 가게에 도매하면서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것 같았다. 그는 이곳에서 가까운, 대야동 북편 저지대의 땅을 사들여 유곽을 만들려고 성곽을 허문 장본인이었다. 성곽에서 나온 흙으로 넓은 저지대를 메우려는 계산이었다. 계승이 성곽을 허무는 데 참여했으니까 결국 유곽을 세워 돈을 벌려는 이와세의 작업에 일조한 셈이었다.

"더러운 새끼."

마욱진을 겁박하려다가 자경단의 방해를 받았고, 그 자경단을 이끄는 이와세에게 일격을 가하려는 게 이번 일의 단초였다. 그런데 이와세가 성곽 철거와 유곽 건설의 입안자이도 한 것이다. 도시의 상황이 얽히고설켜 있으나 주요 인물들은 흐르는 물줄기처럼 곳곳에서 마주쳤다.

계승은 처마가 넓게 펴진 이와세 상점이 어둠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상점에 불빛 한 점 비치지 않았다. 거리는 텅 비었다. 계승은 몸을 숨기듯이 이와세 상점을 돌아 골목으로 들어섰다. 상점은 6미터 폭의 큰길에 접했지만 좁은 골목을 끼고 있었다. 사방은 고요했다. 계승은 이와세 상점 벽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나무껍질을 다닥다닥 붙여놓은 일본식 특유의 비늘 판벽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품에서 석유 깡통을 꺼냈다. 석유를 판벽에 끼얹고 성냥을 던지면 그만인 것이다. 그는 깡통을 더듬어 밀랍으로 막은 구멍을 찾다가 고개를 돌렸다. 휘익휘익, 처마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그는 큰길 쪽을 건너보았다. 여전히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둠 속으로 멀리, 망경루가 높이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망경루는 초롱처럼 작았고 곧 사라질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계승은 소스라쳤다. 골목 안쪽에서 뭔가가 어슬렁거렸다. 잘 짖지 않는 털북숭이 삽살개였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다른 개들까지 몰려나오면 곤란했다. 계승은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석유 깡통을 들고, 다른 손으로 판벽을 빠르게 쓰다듬으면서 디귿자로 옴폭 들어간 지점을 찾으려고 했다. 며칠 전에 봐 두었었다. 공사를 잘 못한 탓인지 판벽에 틈이 많아 불이 잘 붙을 만한 곳이었다. 그곳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바닥에서 술오줌 냄새가 역하게 올라왔다. 계승은 밀랍으로 막은 구멍을 뚫고는 석유를 판벽에 뿌렸다. 판벽 위에 걸쳐져 있는 처마에도. 손을 아주 민첩하게 움직였다.

성냥을 그어 판벽에 댔다. 불이 퍽, 치솟았다. 불기운이 그를 밀어냈다. 그는 뒤를 돌아 골목을 내달렸다. 두어 골목을 꺾었을 때, 개들이 짖어댔다. 순식간에 컹컹컹 떼거리로 짖는 소리에 골목은 마치 화염에 휩싸인 듯했다. 계승은 급히 방향을 틀었다. 하마터면 정거장으로 달릴 뻔했다. 그쪽은 일인 상가 지대였다. 상가문은 닫았지만 잠을 깬 일인들이 뛰쳐나올 것이다. 어디선가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계승은 잠깐 방향을 헤아리다 우현서루 쪽으로, 이번에는 천천히 걸었다. 막무가내로 달리다가는 오히려 발각되기 십상이었다. 이와세 상점은 제대로 불이 붙은 듯했다. 골목 건너에서 불꽃이 치솟는 광경을, 직접 볼 수 없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골목 하나를 지나 우현서루가 보이는 큰 길로 접어드는데 갑자기 뒤에서 횃불이 비쳤다. 자경단인가? 길 저 끝이 희뿌옇게 밝아지고, 이와세 상점 쪽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오돌매였다. 곱사등이가 왜 저기 있지? 놀라워할 틈도 없었다. 곱사등이가 뭐라 소리 지르며 계승에게 손을 뿌렸다. 계승은 멈칫, 했다. 이와세 상점에서 우현서루 길로 한 무더기 횃불이 쏟아져 들어왔다. 길이 환해졌다. 곱사등이가 구르듯이 달렸지만 횃불을 든 일인들에게 이내 따라잡혔다.

계승은 혼자 달아날 수도 없었다. 불빛이 발밑으로 파도처럼 밀려왔다. 계승은 머뭇대다 다짜고짜 길 옆 두엄더미 속으로 뛰어들었다. 두엄이 아니라 두엄을 만들려고 썩히고 있는 노적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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