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무형문화재, 10만 시간의 지혜] (12) 상주민요 육종덕 어르신

"농사지을 때 힘내려고 부르던 노래 대회 나가 평소처럼 했더니 상받아"

경북도지정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상주민요 선소리꾼 육종덕 옹이 마을 초입에서 민요 한 자락을 뽑아내고 있다.
경북도지정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상주민요 선소리꾼 육종덕 옹이 마을 초입에서 민요 한 자락을 뽑아내고 있다.

16살 때 초산동 어른들한테 배워

1970년대부터 집단 농요 끊겨

상주민요 인원 46명으로 감소

"마음 합치면 못할 게 없어"

초산동은 상주시내라고 하기엔 다분히 농촌마을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멀리 산이 솟아 있고 주변은 모두 평야다. "저기 보이는 산이 여기서 어느 정도 거리냐"고 묻자 3㎞ 남짓이라고 했다. 드문드문 과수나무가 보였지만 반경 3㎞가 거의 논이다. 삼백의 고장 상주에서도 넓은 뜰을 갖고 있어 부촌으로 불렸다는 초산동이다.

마을 초입 정자에서는 할머니들이 윷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들에겐 범죄 없는 마을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넉넉하니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여유였다. 이런 동네에서 오랜 기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노래가 상주민요였다.

상주민요 선소리로 경북도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된 육종덕(87) 옹은 시쳇말로 쌩쌩했다. 소리를 뽑는데 예사롭지 않았다. 1시간 남짓 진행된 인터뷰에서도 여유와 웃음으로 범벅이 됐다. 자연스레 건강 비결을 집중적으로 묻게 됐다. '생로병사의 비밀' 제작팀인지 착각했을 정도로. "마을로 들어서며 탁 트인 평야가 인상적이었다"고 하자 곧바로 "그러니 품앗이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지요"라고 했다.

"이 동네는 농악으로 유명했어요. 우리 동네가 상주군에서 1등도 하고 막 그랬죠. 그런데 어느 날 이장이 군에서 회의를 했는데 무슨 대회가 있다고 그래요. 대구에서 웬 교수 하나가 대회에 나가보라고 했다고. 그래서 모심을 때 원래 하던 대로 했죠. 그기 상을 받은 거라."

육 옹이 말한 '어느 날'은 1985년쯤이고, '무슨 대회'는 1986년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다. 그때 그 '이장'은 현재 상주민요보존회장을 맡고 있는 임중성(72) 씨다.

상주민요는 농사지을 때 부르던 노동요다. 평소에 부르던 것을 대회에 나가서 한 번 더 부른 셈이었다. 노래는 모심기노래, 논메기소리, 타작소리로 벼농사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나도 어른들 하는 걸 배웠지요. 16살이었던가. 전쟁(6·25전쟁) 나기 전이었지요. 지금은 농사를 지으면서 노래를 부르진 않지. 하매 벌써 기계화 다 됐고, 이제는 농사짓는 사람이 확 줄었는데 뭘."

손으로 모를 심으며 집단 농요를 부르던 건 1970년대가 사실상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1986년 대회에 입상했을 때도 논에서는 기계로 모를 심었다고 했다. 결국 상주민요도 전체 60명으로 시작한 인원이 현재 46명에 그친다. 이 중 절반 이상은 여성이다. 시작 당시 구성원 모두가 남성이었던 것에 비하면 큰 변화다. 그러나 이들에겐 마을의 자부심만큼 노래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스스로를 민속자료 전수자라 불렀다.

인터뷰를 지켜보던 임중성 상주민요보존회장은 "상주민요를 통해 옛 농경사회의 삶을 전하는 것이다.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전수자도 없으면 자연적으로 수명을 다할 것이라 예상한다. 특히 상주민요는 농사와 반드시 연결해야 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농사짓는 사람으로 한정해서 사람을 충원할 계획이긴 하다"고 했다.

자부심의 근원은 마을의 평화와 관련 있어 보였다. 초산동은 남, 강, 박, 함, 김, 이 씨 등 각 성이 어우러져 살아온 곳이었다. 맹주가 있는 마을이 아니었다. 65호 정도로 구성된 마을에서 논농사를 이어가려면 품앗이로 손을 빌리는 건 필수였다.

"한 집도 미미한 집이 없지. 괄시해서도 안 되고. 상주민요라는 것도 힘든 농사를 쉽게 해내려고 불렀잖아. 덕분에 모두 힘을 낼 수 있었지. 마음을 합치면 못할 게 없어. 독불장군이란 건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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