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37>-엄창석

노적가리 속이 굳은 흙더미처럼 딱딱했다. 몸을 집어넣는데 얼굴이 할퀴고 가슴이 긁혔다. 볏단 속은 꽝꽝 얼어 있었다. 계승이 얼은 볏단 더미 사이를 비집고 지렁이처럼 파고들었다. 볏단이 꿈틀거리는 게 보이지 않을까. 이렇게 딱딱한 건 눈이 내렸기 때문이겠지. 볏짚이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물러지고 흐무러지겠지. 그래야 봄이 되면 제대로 썩은 거름이 되지 않을까. 어이없게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계승은 노적가리에 몸을 숨긴 채, 밖에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허리와 다리를 비틀어서 언제든지 뛰쳐나갈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앞에서 들렸다. 계승은 볏짚 틈으로 눈알을 대고 밖을 훔쳐보았다. 일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횃불을 휘둘렀다. 어디를 얻어맞았는지 오돌매가 쓰러져 있었고 갑자기 일인들이 오돌매를 버려두고, 불이 난 장소로 우르르 달려갔다. 이와세 상점 쪽에서 화염이 치솟는 게 보였다. 불꽃놀이를 하듯이 캄캄한 창공으로 화염이 솟구쳤다. 놈들이 돌아오기 전에 곱사등이를 업고 도망을 쳐야겠다 싶었다. 계승이 노적거리에서 나가려고 할 때였다. 불이 난 이와세 상점 쪽에서, 어둠속으로부터 거대한 빛 덩어리가 왈칵 튀어오르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이쪽으로 달려왔다. 말을 탄 일본 병사들이었다. 수비대 군복을 입고 한손에 총을 쥔 채 말을 타고 달려왔다. 뒤따라온 병사가 말 위에서 횃불을 오돌매에게 비추었다. 바닥에서 오돌매는 달팽이처럼 몸을 움츠렸다. 맨 앞의 병사가 말 등에서 총구를 아래로 내리고 오돌매를 겨냥했다. 계승의 눈앞에서 횃불이 일렁였다. 불과 2미터 거리였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의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어둠의 한가운데, 곱사등이와 말의 다리가 오롯이 드러났다. 오돌매는 비쭉 튀어나온 등을 위로 웅크리고 머리를 감싸 안았다. 기둥처럼 서 있는 붉은 마각(馬脚)은, 마치 아름다운 듯이 잔털까지 불빛을 받아 미세하게 반들거렸다.

총구가 위로 올라갔고, 말이 뒷걸음을 쳤다. 병사가 말을 뒤로 물리고 있었다. 횃불은 여전히 곱사등이를 비추고 있었으므로 병사의 말은 눈앞에서 사라진 듯 보였다. 왠지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을 그때였다. 얼마쯤 뒤로 물러섰던 말이 앞으로 치달았다. 붉은 마각은 오돌매의 짧은 다리와 튀어나온 등을 짓밟았다. 검은 발굽이 목덜미에도 떨어졌다. 오돌매는 몸을 비틀었고, 말은 마치 구르는 작은 바위에 올라서려는 듯이 집요하게 오돌매를 유린했다. 배에서 내려오는 붉은 다리와 끝에 달린 검은 말발굽은 어떤 잔혹성을 반복하듯이 이상스러울 만큼 작은 몸체에 집착하고 있었다.

계승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눈을 감고 있었던가. 오돌매가 그에게 이와세 상점에 불을 질러라 해놓고 걱정되어서 뒤쫓아 왔을까, 아니면 망을 봐주려고 했는지 모른다. 달리지도 못하는 놈이...... 하지만 그딴 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돌매가 말에 짓밟히는 것을 보고 뛰쳐나가 말의 배라도 걷어차고 말겠다는, 잠시 치솟던 용기도 사그라졌다. 모든 게 허물어졌고 무의미했다. 볏짚이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거름이 되듯이, 자신도 여기서 얼었다 녹았다는 반복하면서 거름의 일부가 되겠거니 했다.

바깥이 고요했다. 수비대들이 떠난 듯했다. 계승은 노적가리에서 기어 나왔다. 주위는 깜깜했다. 오돌매는 죽었을 것이다. 시신을 말에 싣고 갔을까. 칠흑 속이라 길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그곳에 아직 오돌매가 쓰러져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잘 알 수 없었다. 계승은 손을 더듬어 오돌매가 있는지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이와세 상점은 아직 불길이 잡히지 않은 듯했다. 사람들이 우글대고 있는 게 멀리 보였다.

계승은 우현서루 앞으로 걸어갔다. 집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가끔씩 수비대들이 말을 타고 지나갈 때마다 깜짝 놀라 담장 아래로 그림자처럼 몸을 피했다. 짚북데기나 두엄이 옷에 묻어서 의심을 받을 염려가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 때문은 아니었다. 혼자 살아남은 터였다. 그래서 죄의식이라도 들었던가. 그것도 아니었다. 계승은 처참했고 무력했다. 불을 지르러 올 때처럼 개천을 건너고 천왕당지로 에둘러서 자신의 자취를 감출 수도 있었다. 큰장으로 가서 지난달에 파놓은, 노새 마굿간 밑 아지트에 들어가 숨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의욕이 일지 않았다. 말들이, 그 아름다운 다리를 율동적으로 움직여서 오돌매를 밟고 있는 모습에서 한없는 무력감이 느껴졌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동물에 밴 익숙한 잔혹성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지 않나. 계승은 터벅터벅 걸었다. 우현서루를 지나 달서교 쪽으로 내려가다가, 큰 기와집을 보고 멈췄다. 골목으로 사람들이 나와 있는 집도 있었고 불구경하려고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앞에 보이는 기와집은 농루였다.

왜 갑자기 애란이 보고 싶은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눈앞에는 오돌매가 말발굽에 짓밟히는 영상이 떠나지 않는데도 애란의 목소리와 흰 팔과 쳐다보는 눈빛이 그리웠다. 농루 대문은 닫혀 있었다. 불이 켜진 방도 있었지만 기루의 여자들은 아무도 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강가를 따라 한 떼의 헌병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보이지 않았으나 말발굽 소리와 횃불의 이동으로 알 수 있었다. 헌병부대는 달성토성 앞에 있었다. 내려가다 마주칠 가능성이 있었다. 계승은 농루 뒤를 돌아 담을 타고 넘었다. 담장이 낮아 월담하기는 쉬웠다. 컴컴한 후원으로 들어섰다. 광문사 문회가 열리던 날, 그녀와 김치를 꺼냈던 김칫독이 어렴풋이 보였다. 만약에 헌병 부대가 지나다가 농루에 들이닥치면 빈 김칫독에 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농루 옆 골목길로 헌병대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계승은 담에 바싹 붙어서 땅에 묻힌 일곱 개 김칫독 가운데 비어 있는 김칫독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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