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 파워 인터뷰] 이공래 디지스트 교수

"대기업도 4차 혁명 따라가기 버거워…신지식 벤처 육성을"

이공래 교수가 자신이 기본구상과 개념설계를 맡았던 디지스트 캠퍼스에서 대학의 상징인 도서관을 배경으로 대구테크노폴리스와 디지스트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노익 대기자 noik@msnet.co.kr
이공래 교수가 자신이 기본구상과 개념설계를 맡았던 디지스트 캠퍼스에서 대학의 상징인 도서관을 배경으로 대구테크노폴리스와 디지스트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노익 대기자 noik@msnet.co.kr
이공래 교수가 디지스트의 교과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노익 대기자 noik@msnet.co.kr
이공래 교수가 디지스트의 교과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노익 대기자 noik@msnet.co.kr

"국가에서 전략산업을 선정해 잘나가는 기업을 집중 지원하는 정책이 1980년대까지는 유효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패러다임이 변화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기업 R&D(연구개발)를 통한 신산업 육성 개념을 제대로 갖지 못했습니다."

이공래(64)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이하 디지스트) 교수는 "신제품과 신기술을 끊임없이 창조하면서 매출과 이윤을 증가시켜 고객을 만족시키고 투자자를 안심시키는 일은 기업가 본연의 임무이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생존할 수 있는 기본원칙"이라며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윤을 연구개발에 투자하기보다 임금이 싼 나라에서 노동자를 수입하거나 생산지를 아예 중국'동남아 등지로 이전하여 해외투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해왔다"고 한국 경제 위기의 본질을 진단했다.

이 교수는 "대기업은 스스로 연구개발 역량을 갖추고 글로벌 경쟁력을 키워 갈 수 있지만, 대구경북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소기업은 연구개발에 투자할 여유도 역량도 취약하다"며 "중앙정부 출연 공공기관들이 지방정부와 함께 지방의 성장 잠재력을 확충하고 지방특수적 기술개발사업을 기획'실행하는 '연구개발의 지방화'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최고의 과학기술정책 분야 전문가로서 대구테크노폴리스와 디지스트의 기본구상과 개념설계를 맡았던, 이 교수로부터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대구경북 산업이 나아갈 방향과 인생 전반에 대해 들어봤다.

◆얼떨결에 융합연구의 길로

이 교수는 1953년 전라북도 남원에서 5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남원 임하초'남원중을 졸업하고 전주공고 기계과로 진학했지만 취업보다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비행기 조종사를 꿈꾸며 공군사관학교를 지원했다. 시력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탈락하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대학등록금이 없어 진로를 고민했습니다.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과에 진학했고, ROTC(5기)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공대생이지만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대학신문사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습니다."

5년이라는 다소 긴 군생활(대위 예편)이 뜻하지 않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1기갑여단 근무 후 부산병기학교에서 4년간 교관생활을 하며 부산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별다른 뜻이나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니라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교관생활이 시간적 여유도 있어 그냥 재미있는 공부를 했을 뿐이었다.

"원래는 예편 후 바다가 있는 부산에서 직장을 구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일자리가 없어 할 수 없이 서울로 가야 했습니다. 산업연구원에 지원했는데 어렵지 않게 합격했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에 공학과 경제학을 같이 공부한 사람을 찾기란 정말 쉽지 않았거든요. 기계공업육성정책을 제대로 제안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경제를 모두 알아야 했고, 발전설비 구조조정, 한국중공업 구조조정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유학으로 시야를 넓히다

산업연구원에 근무하면서 장학금을 받으며 2년간 태국 타마사트대학에서 유학할 기회를 얻었다. 타마사트는 미국이 베트남전쟁 당시 지어준 대학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20명을 초청, 함께 공부했다. 그 덕분에 동창들과의 대화를 통해 아시아 각국의 경제발전 역사에 대해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가 부족했다.

"정책제안 중에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도 '단지 R&D를 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 말고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는 게 없어 구체적인 제안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연구자로서 너무 답답했습니다."

영국 스섹스(SUSSEX)대학 스푸르(SPRU)연구소 박사과정에 진학한 것은 이런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이미 1960년대부터 융합연구가 발전했다. 스섹스대학은 노동당 정부가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등 전통적인 대학의 경우 고정관념 탓에 새로운 융합연구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 설립한 대학이다. 이 교수는 1994년 '한국인 1호'로 이곳에서 과학기술정책 분야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시절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낸 정근모 박사가 객원연구원으로 와 같은 연구소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인해 정 박사가 김영삼정부에서 다시 장관으로 임명되자 이 교수는 '장관자문관'을 지냈다. 유학 당시 소련이 붕괴되고 유럽이 통합되는 등 역사적 격변기였던 덕분에 유럽 각국을 여행하면서 많은 경험을 했다. 기술관리, 이노베이션 경영, 경제발전과 과학기술, 소련의 과학기술정책 등을 비롯해 국내에선 들어보지도 못한 신개념들을 배우고 익힐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대구테크노폴리스와 디지스트 '인연'

"산업연구원의 책임연구원(현 선임연구위원)으로 일하면서 '한국의 국가혁신체제' 프로젝트를 맡아 우리나라의 이노베이션 시스템을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연구가 마무리될 무렵 갑자기 IMF 외환위기가 닥쳤습니다. 연구 내용은 전면 수정을 거쳐 '한국의 국가혁신체제-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기술혁신정책의 방향' 보고서로 완성됐습니다."

보고서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대히트를 쳤고, 정치인 국회의원 교수 연구자 공무원 등 전문가 그룹의 필독서가 됐다. 정부에서는 이 교수의 공로를 인정해 '국민포장'을 수여했다.

"그전엔 국가 R&D 정책이 주요 연구과제였지 지방에는 사실상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2002년 과학기술도시로의 전환을 희망하는 대구시로부터 프로젝트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인해 또다시 10년 이상을 지역혁신체제 구축 연구에 집중하게 됐는데요. 제가 구상한 대구테크노폴리스와 디지스트에서 근무하게 될 줄은 당시엔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엔 간극이 있기 마련이다. 대구테크노폴리스의 경우 주민들이 걷거나 자전거로 모든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주거+상업+기업'이 믹스된 컴팩시티를 지향했지만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고, 연구단지 구성도 외소화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디지스트는 서울(30%), 부산경남(25%), 대구경북(15%) 등 전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며 자리를 잡고 있지만, 우수 인력 확보를 위한 재정적 뒷받침과 국제 커뮤니티 구축, 교통'접근성 개선 등 여전히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는 설명이다.

"대구테크노폴리스와 디지스트 인근에 9천900여㎡(300만 평) 규모의 국가산업단지가 있고, 그 근처에 달성 1, 2차 산업단지가 있습니다. 이노베이션 생태계를 갖춘 무려 4천960만㎡(1천500만 평) 규모의 세계적 과학기술산업단지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 전체를 아울러 세계적 클러스터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진 리더가 없어 사실상 방치되어 있는 것이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4차 산업혁명,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지금까지의 지역발전 정책은 산업단지 조성과 같은 공간적 수단에 그쳤고 산'학'연 네트워크 구축을 통한 혁신 클러스터 육성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의 근간이 되는 신지식과 신기술은 기존의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이 따라가기 힘듭니다. 오직 열정을 갖고 해당 분야를 개척하는 벤처기업만이 혁신을 이뤄낼 수 있는데요. 그래서 지식기반 벤처기업 육성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인건비와 각종 부대비용을 포함하면 1인당 교수 5억원, 중앙부처 연구원 3억~4억원, 민간연구원 3억원 등 상당한 비용이 소요된다"면서 지방에서 제대로 된 이노베이션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어려운 이유를 설명했다. 그래서 요즘 '저비용 이노베이션 패러다임'이 주목을 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저비용 이노베이션 패러다임은 평범한 시민들의 창의성을 발현시키고, 이를 전문가들이 체계적으로 보완해 창업이나 기술혁신에 큰 성과를 내는 것을 말합니다. 성공의 관건은 주민'시민이 불평불만을 터트리는 대신에 아이디어를 내고 제언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이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핵심 전문가 그룹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 교수는 로봇,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기술은 이미 나와 있고, 대구경북의 전략산업도 선정되어 있다고 했다. 이노베이션을 위한 외적 생태계도 잘 갖추어진 편이라는 설명이다.

"이제 대구경북 산업이 신기술에 얼마나 매칭되는지, 이를 어떻게 발전시켜가야 하는지, 정밀하게 분석하고 기획하는 전문인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인재를 찾기 힘든 것이 지방의 한계입니다. 또 과학기술자는 기술만 알고 정책은 모르는 반면, 일반 정책연구자는 정책만 알고 기술을 모릅니다. 산'학'연 연계협력이 겉돌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디지스트와 지역 대학을 활용하고, 산'학'연 협력전문가를 유치하고 키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교수는 부산처럼 과학기술진흥원을 설립하거나 대구경북연구원에 과학기술정책 관련 부서를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이공래 교수는?

산업연구원 책임연구원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과학기술처 초대 장관자문관을 지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KAST)과 한국공학한림원(NAEK) 정회원, KAST 정책학부장,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교수로서 초대 기획처장을 역임했다. 현재 DGIST 이노베이션경영프로그램 책임교수로 있다.

기술경영경제학회, 한국아시아혁신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SSCI 저널인 Asian Journal of Technology Innovation을 창간했다. 2008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으로부터 과학기술정책 및 혁신 전문 분야에서 전 세계 영향력 있는 톱 100 과학자로 선정되었다.

또 영국 Routledge사를 통해 1998년 Capital Goods Innovation, 2016년 Convergence Innovation in Asian Industries, 2017년 Managing Convergence in Innovation 등 영문저서를 발간했다. 이외에도 다수의 국문저서와 26편의 국제저널 논문, 49편의 연구보고서, 52편의 국문논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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