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38>-엄창석

제9장

"밖으로 나가지 마."

여자들 다섯 명이 내의 차림으로 초연 언니 방에 모인다. 설루, 은낭화, 옥매, 금릉. 다른 여자들은 자기 방에서 자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바깥의 동향을 살피고 있을까. 설루가 대문 밖으로 나가보겠다고 하자 초연 언니의 말이 떨어진다. 모두 우현서루 동편에 불이 난 걸 알고 있다. "일인 상점들이 있는 곳이잖아." 누군가 두려운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렇지. 거기엔 일인 상점이 많이 모여 있어.

금릉은 일인 상점이란 말에 맺힌 어감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 말은 이전과 다르다. 어쩌다 일인들이 들어와 작은 가게를 열어 눈깔사탕을 팔았거나 빈궁한 철도 공사 인부들이 나타났지만, 어느새 성곽 북편 땅을 거의 차지했다. 이제는 도시를 휩쓸고 있다. 마치 바다 가운데서 힘을 얻어 해안을 밀어붙이는 해일처럼 일인 상점들의 위력은 갈수록 드세졌다. 그래서 불길하다. 하필 일인 상점이라니. 누군가의 실수로 난 화재라 해도 한동안 뒤숭숭할 게 틀림없다. 만약에 그들을 원망하는 한인이 불을 질렀다면 어떻게 될까? 금릉은 진저리를 친다.

여자들은 불안한 눈짓으로 서로를 확인한다. 눈을 깜빡이며, 입술에 희미한 웃음을 띄우면서. 그녀들은 무엇을 확인할까? 그녀들은 최근 사태가 주는 변화에 자신들이 가장 앞서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변화에 제일 민감한 게 자신들이다. 하지만 단지 그녀들만 민감할 뿐이다. 누구도 그녀들의 불안과 상처를 눈치 채지 못한다. 정원에 아름답게 피어서 방문객들의 눈길을 받다가 어느 날 서리를 맞아 대궁까지 꺾여버려도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는 꽃처럼.

어린 여자들은 하나씩 슬그머니 초연 언니 방을 빠져나간다.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흰 그림자들이 문지방을 타넘고 장마루로 스르르 이동하는 것 같다. 금릉도 자신의 방으로 걸어간다. 방문 앞에서 언뜻 걸음을 멈춘 것은 골목 밖으로 횃불이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박. 따박. 따박. 어둠이 한주먹씩 날아오는 것 같다. 말발굽이 바닥을 차는 소리였다. 단호하고 자신감이 밴 말들의 발굽 소리. 그녀는 방 뒤에 붙은 좁은 도장으로 들어가서 봉창에 눈을 댄다. 그 순간, 그녀의 눈은 믿을 수 없어한다. 그녀의 시선이, 그녀에게 일순, 마비를 일으킨다.

골목이 아니라 담장 안이다. 본채에서 길게 돌출된 굴뚝 연통로 옆에 숨어 있는 남자가 보였다. 일꾼 김씨가 아니다. 그는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갔다. 농루에 숙식하는 사내라고는 밥을 얻어먹고 잔일을 거드는 소년 둘뿐이다. 잠깐의 마비에서 풀려난 금릉은 굴뚝에 몸을 가린 남자가 임계승임을 알아챈다. 계승은 골목 밖으로 지나가는 불빛을 주시하면서 몇 발짝 앞에 묻힌 김칫독으로 뛰어들까 기회를 엿보는 것 같다. 아니면 망설이고 있는지 모른다. 두 번째, 빈 김칫독에 뚜껑이 열려 있다.

횃불이 지나가고 골목은 다시 캄캄해진다. 금릉은 뒷방을 나와 후원으로 통하는 좁은 마루로 살금살금 걸어간다. 맨발로, 본채 뒷처마 아래를 따라가면서 일부러 기척을 낸다. 낮은 연기 통로 너머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저예요. 놀라지 마세요."

계승의 텁수룩한 머리가 기와로 덮인 연기 통로 위로 쓰윽 올라온다. 두엄 냄새가 확 끼친다.

시궁창에서 기어 나온 양 그의 옷이 더럽다. 금릉은 자신의 침실 옆방으로 그를 데려간다. 그가 머뭇거리다 잠자코 따라온다. 그녀의 침실 옆방에는 대나무 목욕통이 그대로 놓여 있다. 좀 전, 불 소동이 나기 전에 그녀가 목욕했다. 이날따라 일하는 소년들이 감기가 들어서 목욕통의 물을 비우지 못했다. 아침에 치우라고 이른 것이다. 옆 침실에 밝혀놓은 호롱 불빛이 목욕방 장지문에 은은하다. 금릉은 어슴푸레함 속에 오도카니 선 계승을 힐끗 보다 고개를 돌린다. "물이 식었지만 씻으세요." 입술에 손가락을 붙이며 낮은 소리로 말한다. 조용히 씻어야 한다는 뜻이지만 그보다 자신의 말을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신호에 가깝다고 금릉은 생각한다. 그가 대답을 하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는다.

그제야 금릉은 계승을 바로 쳐다본다. 방 사이의 창호를 통과한 엷은 불빛이 그의 가슴과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를 비춘다. 좁은 공간에서 그와 둘만 있을 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그녀도 이제 열아홉 살이다. 마치 그의 나이를 따라잡은 듯이 성숙했다. 그런데 왜 그의 몸에서 시궁창 냄새가 풍기지? 야윈 뺨과 쑥 들어간 눈두덩에 초췌함과 불안이 가득하다. 뭔가 바깥의 사태와 관련 있다는 것을 직감하지만 거기서 생각을 멈춘다. 그녀가 말한다.

"옷을 가져올게요."

당연히 사내 옷이다. 기루에는 사내 옷이 여러 벌 준비되어 있다.

"애란아."

어둠 속에서 그가 부른다.

"애란이 아니에요. 금릉이라고 부르세요."

그녀가 고개를 젓고 장마루로 나온다. 잠시 후 사내 옷을 가지고 침실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옆방에서 찰랑찰랑하는 물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옷을 가슴에 안고 숨을 멈춘다. 물이 찰랑거리는 사이로 몸을 문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얼굴이 상기된다. 그러나 창호지에는 불빛만 가득하고 결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그럴 때가 있었다. 계승을 떠올리면 그가 사라지고 그저 백색(白色)만 펼쳐질 때가 있었다. 목소리, 손바닥, 머리카락, 눈빛이 지워져서 더 이상 회상해볼 게 없었다. 그는 7년 속으로 사라졌어. 한번이라도 소식을 주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거야. 지금 저 백색의 문을 열면 그는 존재하지 않고 물소리만 홀로 찰랑거리고 있을 것 같았다. 금릉이 장지문에 손을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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