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수확 때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빛보다는 어둠이, 선보다는 악이 더 활개를 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착하게 살고 있는 무죄한 이들이 불이익을 당하고 악한 사람들이 오히려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 것 같은 모순적인 상황을 그냥 힘없이 지켜만 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왜 악한 자들에게 지금 당장 천벌을 내리시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43)는 살면서 만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잠시 생각하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성경 구절에서, 밀밭 가운데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는 것을 주인과 종들이 봅니다. 그러자 종들은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 하고 주인께 문제 해결을 건의합니다. 언뜻 보기에 그것이 최상의 해결책 같습니다. 나쁜 것이 보이기에 뽑아 버리고 싶은, 아니 뽑아야 할 것 같은 사명감에 불탑니다. 우리에게도 세상의 악에 관하여, 혹은 타인의 잘못을 심판하기 위해 매일 이야깃거리가 풍성합니다. 그 사이에 밀밭이 망가지고 옆에 있는 멀쩡한 밀알들이 흩뿌려져도 잘 모르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그냥 악을 처단하는 용감한 자가 되기도 합니다. 가끔 지적하는 말로 출근길 남편의 마음을 망가뜨리기도 하고, 온종일 집안일로 고생한 부인의 마음을 한마디의 불편한 말로 엉망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공동체에 문제가 있는 사람 하나 때문에 서로 지적하느라, 때로는 그래서 편이 갈라져 싸우느라 전체가 들썩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비유에서 주인의 판단은 좀 다릅니다. 종들의 말에 주인은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29-30)고 얘기합니다. 주인은 밀밭 자체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또 수확 때의 풍성함을 기대하며 기다려 주고 견디어 줍니다. 가라지에 집중해서 세상의 악을, 부정적인 모습을 지금 당장 제거하려 하기보다 밀에 집중해 가라지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밀이 같이 뽑히지 않도록 수확 때 가라지만을 골라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비유의 주인이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은 세상의 악과 부정을 심판하기보다(물론 심판하시지만) 귀한 사람들이 좋은 모습들을 열매 맺을 때까지 돌보고 기다린다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즉각적인 행동이 중요하고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결실은 과정을 견디어 낼 때 얻어진다는 생각도 듭니다. 너와 함께하는 것,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것, 이 사회를 유지하는 것 등과 같이 살기 위해서 견뎌내야 할 것이 많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아 훌륭한 성인으로, 사회에서 좋은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키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결실의 시간까지 견뎌내야 합니다. 견디며 사는 것도 큰 사랑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랑이 견디는 시간들에 희생만이 아니라 기쁨이 함께하게 해주겠지요.

악과 부조리를 제거하는 노력은 물론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나와 가까운 누군가를, 가족을, 동료를, 흠 없는 사람, 완벽한 사람 그것도 어쩌면 내 기준에 그런 사람과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심판자가 되지 않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완벽주의나 무결점(無缺點)에 집착하다가 그 대가는 무결실(無結實)일 수 있을 테지요.

결실을 이룰 때까지 내 마음과 내 삶에 심어진 좋은 것(재능이든 능력이든 환경이든 이웃이든)을 발견하고, 보호하고, 감사하고, 키우는 것이 나의 우선적인 몫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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