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여행의 추억

고려대 의학과 졸업. 의학박사. 하버드의대 정신과 펠로우, 성동병원 진료과장
고려대 의학과 졸업. 의학박사. 하버드의대 정신과 펠로우, 성동병원 진료과장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지내던 어머니가 여명 6개월의 말기암 진단을 받은 것은 2012년 2월이었다. 항암제 투여만으로는 병의 호전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호스피스의 도움을 받으면서 차분히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옳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러 의학 논문을 뒤진 끝에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일본 도쿄를 방문해 면역세포치료를 받게 하기로 결심했다. 가족과 함께 8개월 동안 2주 간격으로 총 15회의 치료 여행을 다녀왔다. 이른 아침 김포공항에서 출발해 당일 저녁 하네다공항에서 돌아오는 고된 일정이었다. 병원 위치가 공항에서 가까웠고, 편하게 누울 수 있는 비즈니스석이 잘 갖춰진 국적기가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여행 자체가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생애 최후의 여행이 된 12월 크리스마스까지 어머니는 여행을 기대하면서 고통을 견뎌냈다.

호스피스 전문의인 오츠 슈이치가 쓴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라는 책에는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떠났더라면'이라는 내용이 있다. 부모님을 모두 떠나보내고 나서야 인생이 너무나 짧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여행을 하려고 노력 중이다. 1971년에 발간된 '대지의 가교'라는 책을 요즘도 자주 펼쳐본다. 세계 각국의 관광명소를 담은 빛바랜 컬러사진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그런 곳들을 방문해보겠다는 꿈을 꿔본다.

20여 년 전 서울에서 열린 국제학회에서 우연히 안도 오사무(安藤治) 박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국제전화로 연락이 닿아 신주쿠에 위치한 그의 연구실을 방문하면서 서로 친해졌다. 국내에도 소개된 '명상의 정신의학', '심리치료와 불교' 등을 집필한 그는 당시 동경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였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무척 친절했고, 그가 일본에서 새로 창립한 정신의학 학회에서 발표할 기회를 내게 주기도 했다. 현지 지인이 차를 태워줘서 그가 잠시 파견 근무를 하고 있던 시즈오카까지 찾아가 만난 적도 있다.

어느 해 그가 교토에 있는 대학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나의 불찰로 연락이 끊기게 되었다. 그가 보내온 장문의 편지에 답장을 못하고 고민만 하다가 긴 세월이 흘러간 것이다. 직접 만나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과는 달리 마음속 생각을 담아 영어로 편지를 쓰기가 힘들었다. 자주 방문해 익숙한 도쿄와는 달리 교토까지 찾아갈 엄두가 안 났다. 나중에 다시 수소문해보니 그는 아주 작은 시골마을에서 정신과 의원을 개업한 상태였다. 공항에서 먼 곳이라서 아쉽지만 다시 만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최근 일본을 방문하면서 예전에 가보지 않았던 곳을 탐색하고 있다. 스마트폰 덕분에 길 찾기가 쉬워졌다.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는 일본의 대표적 지성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지난 3월 그가 책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뒤 집필 활동의 거점으로 삼고 있는 고양이 빌딩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등의 책에 소개된 유명한 건물이다. 일요일 아침 도쿄 고라쿠엔역 인근에 위치한 건물 근처에서 한참 두리번거리다 그와 마주쳤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건물 입구에서 대화를 나누고 같이 기념사진도 찍었다.

지난 주말에는 대구공항에서 나리타공항으로 출발하는 항공편을 처음으로 이용했다. 대구공항은 나리타공항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도심에서 가까워 무척 편하고 좋았다. 도쿄에서 시간을 보내다 신칸센을 타고 오사카로 이동했고 간사이국제공항에서 대구로 돌아왔다. 처음 시도한 기차여행이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기차를 이용해 오래된 지인을 다시 만나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에 실린 또 하나의 주제는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더라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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