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탐정과 경찰

64만600부. 2005~ 2015년 교보문고의 일본인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판매 실적이다. 작가별 판매 순위 4위다. 이는 히가시노 작품과 독자들의 추리소설에 대한 애정을 말해준다. 다양한 추리로 사건을 풀어가는 묘미 때문인 듯하다.

이처럼 인기의 추리소설이지만 우리의 추리소설 역사는 얕다. 한국에서 서구 추리소설 작품의 본격 번역과 소개는 1920년대지만 창작 추리소설의 발표는 드물었다. 근대문학을 연구한 정혜영 대구대교수에 따르면 식민시기 전체 통틀어 겨우 60여 편 정도다. 이유는 많겠지만 추리물의 핵심인물인 탐정이나 그런 직업이 없는 시대 탓도 있었을 것으로 정 교수는 분석했다.

그런데 이들 60여 편의 추리소설 가운데 몇몇 작품의 사건 해결 구도가 흥미롭다.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인 일제 경찰이 사건을 제대로 해결은커녕 오히려 실수를 저지르는 등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대신 범인의 자살 예고, 한국인 탐정이나 인물의 활약으로 사건을 풀어가는 모습이다. 일제 경찰의 공권력이 희화화되고 되레 공권력 밖의 인물이 돋보인다.

1934년 발표된 김동인의 '수평선 너머로'나 채만식의 '염마'(艶魔), 김내성의 1937~1938년 작품인 '백가면'과 '살인예술가' 등이 그렇다. 이들 작품은 각각 한국인 부호 윤백작의 재산 차지 음모(수평선 너머로)와 살인(염마), 무기 설계도 탈취(백가면), 미해결 살인(살인예술가)을 다뤘다. 식민지 특수한 상황을 반영한 창작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 구성 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소설과 비슷한 일이 대구에서 빚어졌다. 1998년 대구여대생 성폭행 사망사건이다. 사건을 추적, 범인을 잡아야 할 경찰은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했고 애끊는 부정(父情)의 아버지가 발 벗고 나선 끝에 2013년 경찰이 재수사에 들어가 범인을 잡은 일이다. 공권력은 손을 놓고 대신 피해자 유족이 수사한 셈이다.

하지만 시효가 끝나 기소된 스리랑카인은 무죄로 풀려나고 말았다. 추리소설 속 희화화된 일제 경찰과 한국인 탐정의 노력은 그나마 독자에게 위안이라도 됐겠지만 이번 일은 무기력한 한국 공권력의 치부만 드러냈다. 아, 하나 더 있다. 풀려난 스리랑카인에게 겉과 속 다른 경찰 공권력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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