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시작되자 주위 친구들은 유럽이나 동남아 등 해외여행을 준비하느라 삼삼오오 바쁘다. 앞 세대만 해도 해외여행 기회도 많이 없었을뿐더러 혹 기회가 있어도 갈 수 있는 나라가 제한적이었다. 반면 우리 세대는 비행기 표만 사면 세계 어느 곳이든 마음대로 갈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목적 없이, 구체적 계획 없이 '남들 따라 나도 간다' 식으로 이 나라, 저 나라 구경하기에 바쁘다. 심지어 요즘은 대세인 '먹방' 따라잡기 여행도 있고, 해외여행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맛집, 사진이 멋지게 나오는 곳만을 찾아다니는 친구들도 더러 있다.
어린 시절 조부모님 댁이 전남 구례군 산동면의 산골이어서 나에게는 산'논'밭'개울'강이 놀이터였다. 할아버지가 아궁이 불쏘시개로 쓰시던 나무 막대기를 몰래 들고 나와 아이들과 이 산, 저 산 뛰어다녔던 것이 내 첫 여행의 추억이다. 돌부리에 넘어져 무릎에 피딱지가 앉아도, 엉겅퀴에 살이 쓸려 종아리며 허벅지가 온통 빨개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이 지리산 자락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산속 옹달샘을 찾아냈을 때의 희열이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다는 묘한 기대감으로 거센 빗줄기가 쏟아지는 속에서도 떠들고 웃으면서 천변을 따라 달려갔다. 마침내 비는 그치고, 천변 끝에는 청둥오리들과 하얀 백로가 앉아 있었으며, 넓은 하굿둑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서 해가 뉘엿뉘엿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때 나는 여행이 말해주는 진솔한 대화를 들은 듯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와서 공부하다 보니 어느덧 이런 심장 떨리는 모험의 세계를 잊어버렸다. 지쳐서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여행은 언제부턴가 가슴 두근거리던 긴장감은 버려진 채 단지 비상구이자 도피처로 바뀌어 있었다.
20대를 주제로 많은 테마여행이 있다. 하지만 단순한 재미 또는 경험을 쌓기 위한, 스펙을 위해서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친구들과 같이 가는 여행도, 혼자 가는 여행도 마찬가지다. 추억 만들기, 단순히 휴식을 위한 시간으로 전락해 버린 듯하다.
이제는 제한된 시간 내 다른 곳을 추가로 둘러보는 시간 절약 싸움이 되었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은 시간적'경제적 제약으로 방송에서 예능과 오락 프로그램을 보는 것으로 대리 만족한다.
나는 가재와 우렁이를 잡고 흥분에 떨며 자랑하던 어린 시절의 두근거림과 청둥오리와 백로가 노닐던 곳, 그 평화스러움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그런 여행의 의미를 아직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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