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39>-엄창석

이상도 하지......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가 왜 한밤중에 농루 후원으로 숨어들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다. 이 일로 자신에게 어떤 불행한 여파가 닥친다 해도 두렵지 않다고 그녀의 마음이 속삭인다. 그가 옆방에 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다른 일들은 하찮게 여겨진다. 청도에서 밀양으로, 언양으로, 부산으로 돌아서 왔다고 했잖아. 아라사(俄羅斯)까지 날개 치며 갔다가 반도로 내려온 두루미처럼 말이지. 금릉은 날개 안으로 바람을 품으며 우아하게 내려앉는 두루미를 잠시 생각한다. 그녀는 목욕방으로 손을 내밀어 옷을 내려놓고 다시 문을 닫는다. 계승이 목간통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서그럭서그럭, 그가 옷을 입는다.

잠시 기다렸다가 금릉이 목욕방 문을 연다. 그는 좀 전 모습 그대로 서 있다. 마치 목욕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녀가 준 옷을 껴입긴 했지만, 초췌한 얼굴로 꺼벙하게 움츠린 그에게서 불길한 동요가 느껴진다. 그가 떨고 있다. 감추려는 듯 애써 입술을 깨물고 있으나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그와 그녀 사이에 괸 공기를 미세하게 흔든다. 그가 나타남으로 그녀에게 다른 모든 것이 지워졌지만 그는 여전히 다른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을, 금릉은 느낀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금릉이 묻는다. 그의 퀭한 눈이 그녀를 보다가 옆으로 흐른다.

"곱사등이가 죽었어. 말들이 쓰러진 곱사등이를 짓밟았어."

그의 말이 끝난 뒤에야 간신히 말뜻을 알아듣는다. 그녀는 실망한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은 것은 그게 아니다. 계승의 마음을 알고 싶은 것이다. 밤중에 담을 넘어 올 만큼 간절하지 않았을까. 금릉은 그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말은 사람을 밟지 않아요."

그녀는 짜증스럽게 그의 말을 부정한다. 말은 사람을 공격하는 경우가 없다. 기수가 떨어져도 밟히지 않도록 겅중 뛰어오르는 게 말이었다. 어이가 없다. 밤중에 찾아와서 하는 소리가 고작 그거냐고 내쏘려다 그만 둔다.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차갑게 말한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갑자기 찾아온 거 미안해."

"그럼, 돌아가요."

"지금 나갈 수 없어. 밖에 헌병들이 깔려 있을 거야."

그가 두려움에 싸여 고개를 젓는다. 왜 그런 생각이 들까. 나갈 수가 없다는 말에서, 마치 그가 자신의 품속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거라고 금릉은 제멋대로 해석한다. 빈방은 많았다. 멀리서 온 손님들은 며칠씩 기루에서 머물기도 했다. 여관이 곳곳에 생기고 일인들이 운영하는 요릿집들이 늘어나, 이즘 들어 자고 가는 손님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따라와요. 발소린 내지 말아요."

금릉이 앞장서서 장마루를 걷는다. 그가 따라온다. 목욕방과 몇 달 전에 떠난 자운영이 썼던 빈 방 사이를 걸어, 후원 쪽에 걸친 뒷방으로 들어간다. 온돌이 연결되어 방은 따뜻하다. 호롱을 켜고, 시렁에 개켜둔 이불을 내린다. 아무도 오지 않을 거예요, 금릉이 한숨 쉬듯 말하고 등을 돌린다.

문을 열고 나가는데 그가 팔을 잡아챈다. 뒤에서 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린다. 금릉이 뒤를 돌아본다. 그가 두렵고 초췌한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본다. 그의 표정이 혼란스럽다. 울먹이는 듯하다가 불안해 하다가 애원하는 듯하다.

금릉은 팔이 잡힌 상태로 그의 턱밑에서 그를 쏘아보며 다시 묻는다.

"뭔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요."

"곱사등이가 죽었지. 이젠 모든 가능성이 사라졌어."

남자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이른 아침에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에 여길 나가세요."

금릉은 비아냥거리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는 잡힌 팔을 빼낸다. 이거 놔요. 다시는 나를 찾지 말아요. 그녀는 속말을 뇌까리며 외면한다. 그녀가 팔을 거두자 그의 손아귀가 가볍게 풀린다. 그녀는 무참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린 남자에게 견딜 수없이 모욕을 당한 기분이다.

그때 그의 초췌한 눈빛이 갑자기 이글거린다. 그가 돌아려는 금릉의 젖가슴을 와락 움켜잡는다. 그녀는 얼어붙는다. 무슨 일일까. 남자의 파렴치한 짓이, 그 순간 쪼개져 있던 그녀의 감정 한 틈을 매우는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금릉은 당혹스러워서 어깨를 약간 움츠린다. 거부하지는 않았다. 남자가 손으로 얼굴을 잡고 덮치듯이 그녀에게 입을 맞춘다. 그녀의 입술 위에 남자의 입술이 거칠게 움직인다. 금릉은 눈을 감는다. 어릴 때부터 꿈꾸어온 그와 입맞춤은 결코 이런 게 아니었다. 그러니 사랑스럽지가 않았다. 황홀하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간직해왔던 사랑스러움이 꺾어지면서, 갑자기 죽음 같은 격정이 몰려왔다. 하늘로부터 소나기가 거세게 쏟아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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