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분홍고무신④-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 논픽션-노순희

나의 생각은 '견디기 힘든 고통'에서 '그래도 행복'으로 급선회 한다

삽화 이태형
삽화 이태형

해안도로를 달리는 시간만큼은 마음의 오물을 털어내고 본연의 나를 찾는 시간이기도 했다. 보호벽도 없는 뒷자리에 앉힌 두 아기는 누가 돌보는 것인가. 저희끼리 종알댄다. 수평선에 피어오른 뭉게구름은 빙하보다 희푸르다. 파도는 겹겹이 하늘색 비단을 펼치듯 자르르 밀려와서 처얼썩 새하얀 포말로 부서졌다. 관세음보살 재우 삼촌을 둘러싼 음울한 사연이 함께 부서지고 부서지며 연거푸 소멸한다. 헛된 욕망과 미완의 꿈이, 녹아내리지 못하고 목울대에 걸려 있는 자질구레한 말(言)의 잔해가 눈앞의 바다로 쓸려나간다. 거대한 바다 앞에서의 나의 통증은 살아있음의 표상일 뿐 한 방울 물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체득한다. 나의 생각 지점은 긍정으로 치달리며 '견디기 힘든 고통'에서 '그래도 행복'으로 급선회한다. 고유한 자연, 살아있는 바다의 역동성이 외부로부터 단절되고 침체된 나의 고정관념들을 흔들어 춤추게 하며 아무도 몰라주는 나의 내면에 대고 한바탕 신명나는 굿판을 벌이는 것이었다. 육신의 힘으로 두 바퀴를 돌리면서 마음의 힘을 얻는 그 엄청난 수확에 나는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시간이면 놀랍게도 암울한 상황에 또다시 적응할 자신감이 비축되어 있었다. 혼곤한 일상을 헤쳐 나갈 용기와 체력을 다져주는 자전거 드라이브는 나만의 행복 수단이었으며 자연으로부터 공으로 얻는 체감 에너지의 일환이었다.

재우 삼촌이 앉아서만 생활한 지 1년 6개월. 그는 창턱에 매 놓은 허리 높이의 줄을 잡고 일어서는 훈련을 시작으로 기적처럼 회복되었다. 걸을 수 있게 된 그는 그간의 남모르는 서러움과 한을 풀고 두 발로 시내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방 안에서 용변을 보던 암담한 시절을 마감했던 것이다. 굳이 달라진 것이라면 그의 발자국 소리가 둔탁하고 깊어진 것이었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발을 떨어뜨리듯 무겁게 걸었지만 달포가량이 지나자 정상인의 걸음으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삶의 또 한 굽이를 돌았다.

나 자신의 한계를 확장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던 날들. 자전거 드라이브로 위안받았던 시간들. 돌아보면 민우 삼촌이 선물한 자전거가 재우 삼촌을 일으켜 세우는 데 기여했다고 보아도 전혀 뜬금없는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병석에서 일어나 걷는 것만을 목표 삼아 나다니던 재우 삼촌은 안정을 되찾은 후 전보다 한결 교만해지기 시작했다. 강우 씨가 출근하고 없는 집 안에서 본인의 존재를 부각시키려는 어리석음에 빠져들었다. 사사로운 일에서 형수를 간섭하려 들었고 그러한 뜻이 소통되지 않으면 무례한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 내가 입은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화장을 하고 다니라는 터무니없는 주문을 하기도 했다. 취학 전인 어린 조카와 동일한 입장이 되어 먹을 것 등으로 다툼을 벌이고 대문을 조금 늦게 열어준다거나 밥이 늦는 등등의 사사로운 일로 고함 소리가 대문을 넘어가는 일이 잦아졌다. 이웃들이 눈치를 챌 정도였지만 설득을 시키기에 그의 부당한 뜻은 병적으로 완강했다. 부드럽게 대할수록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것은 형이 없는 공간에서만 뿜어대는 그만의 다발성 내면의 울화였다. 재우 삼촌이 쏟아내는 비상식적이고 무례한 말들은 나의 심중에서 뱀의 머리처럼 고개를 쳐들고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를 감당하는 일이 끝내 마지막 남은 인내심으로도 버티기 힘들다는 걸 깨달았을 즈음 나는 마음 한구석에 요지부동의 무풍지대를 만들었다. 이를테면 그가 거름망도 없이 감정적으로 쏟아내는 말들을 형체도 소리도 없이 태워버리는 심연의 소각장인 셈이었다. 그리해서 듣기 싫은 어떤 소리도 울분에 몸서리치는 본연의 나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반응도 소요도 없는, 나 자신이지만 나도 건드릴 수 없는 정신 영역의 마지막 보루. 무풍지대에서만은 가슴에 대고 뜨거운 기름을 붓는 것만 같은 폭력의 언어들이 깡그리 타버린 재가 되어 싸늘히 식고 말았다. 이제는 사사건건 그를 설득시킬 언변도 그러고 싶은 의지마저도 없어졌다. 나 자신의 자생력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 없는 공간'인 무풍지대만이 나를 지키는 돌파구가 되었다. 나는 응어리가 남는 말들을 가슴에 새기며 더는 괴로워하고 싶지 않았다.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위로해 주는 이 하나 없는 나를 지키고 싶었다. 지병을 가진 약자로서의 열등감은 수시로 형수 마음을 휘저었지만 무풍지대의 묘약은 놀라웠다. 자제력을 잃고 삶에 휘둘리는 그를 보듬는 내 소견이 시나브로 성숙해져 갔으니 무법의 일방통행자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에 내 안의 무풍지대가 있었다.

"이 버러지만도 못한 놈, 내 앞에서 퍼뜩 꺼져버려라."

강우 씨가 천둥 같은 목소리로 동생을 몰아세웠다. 그것도 행자 언니 앞에서였다. 아내한테서 무슨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자기가 하는 말이 부부 공동의 뜻이라도 되는 듯이 야단을 떨었다. 그간 재우 삼촌의 언행을 옮긴 적 없는 나로서는 기이하고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강우 씨는 평소에도 재우 삼촌에게 다감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편이어서 둘 사이가 늘 건조한 건 사실이었다.

"너보다 잘난 사람은 말고 너보다 못한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가는지 나가서 보고 와라. 팔이 하나 없다거나 다리가 없는 이들조차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고 오란 말이다."

강우 씨는 반강제적으로 재우 삼촌의 등을 떠밀었다. 심지어는 그를 밖으로 내보내고 방에 자물쇠를 채워두기까지 했다. 형의 말에 절대복종하며 살아온 그는 강우 씨 앞에서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위인이었다. 그는 이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침밥을 먹고는 밖으로 나가는 게 일상이 되었다. 어디서 무엇을 보고 어떤 이를 만나고 오는지 어느 하루도 빈손으로 들어오는 날이 없었다. 누군가 내다버린 조화, 화병, 낡은 액자, 고장 난 벽시계, 온도계 등등을 닥치는 대로 들여왔다. 플라스틱 바가지, 인형, 머리빗 등 그 가짓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헌 물건을 들고 오는 것이었다. 물건들은 본인의 방 책상 위에부터 천장에 닿도록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그는 과연 무언가를 들여와 방안을 채워놓으면서 빈 마음이 조금쯤 뿌듯해졌을까. 그리해서 자신도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이라는 자각이 들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강우 씨만을 의지하며 살아온 재우 삼촌에게 형의 냉대는 천길만길 낭떠러지와 같았다. 그에게는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절실했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기우는 풀잎처럼 그는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기울었다. 그의 단순 논리로는 자기 편이 되어주는 사람은 형보다는 형수였고 형보다 부드러운 사람이 형수였을 것이다. 한편 강우 씨의 냉철함은 의외로, 극도로 예민한 나로 하여금 재우 삼촌을 보듬을 수 있을 만큼의 너그러움을 촉발했다. 옹졸한 나에게 서서히 그의 충동적인 심사를 달래고 어우르는 모성애적 새 움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재우 삼촌은 그날그날 만난 사람에 대해서나 보고 들은 온갖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나를 향해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가까이 갈 수 없는 형을 대신하여 뜻을 받아주는 형수에게 안기는 형상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긍정하며 격려했다.

나의 메마른 인성의 텃밭에 돋은 새 움의 기적은 버거운 삶의 바람에 부대끼며 살아온 지나간 날의 소산이기도 할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가 원만해져 갔다. 그와 나는 어느덧 청춘을 넘어섰고 비로소 가족이라는 보다 원숙한 의미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을 인간적으로 결속시킨 요인은 냉정함 뒤에 철저하게 숨은 강우 씨의 우애와 이성의 힘이었으며 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무풍지대의 효과였다.

※매일시니어문학상은

전국 신문사 최초로 매일신문이 제정해 운영하는 어르신들을 위한 문학상 공모전입니다. 만 65세 이상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으며, 공모 부문은 논픽션, 시, 수필 등 3개 부문입니다. 대상 1명 500만원, 최우수상 3명 각 300만원, 우수상 15명 각 100만원 등 총상금은 4천100만원입니다. 주제는 제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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