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이나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사람. 장익현(60)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딤프'DIMF) 이사장. 그는 감성이 풍부하다. 본업은 변호사. 냉철함이 미덕으로 간주되는 직업을 가졌지만, 타고난 감수성은 감출 수 없는 법.
뮤지컬 애호가였던 그는 4년 전 딤프 이사장(임기 3년'연임 중)이 됐다. 그는 딤프를 '시민 속으로, 세계로' 이끌고 있다.
-제11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6월 23일~7월 10일)이 성황리에 끝났다. 이번 행사의 의미와 성과는?
▶11회 행사는 새로운 10년을 시작하는 첫해라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 지난 10년 동안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의 기본 역량(뮤지컬 저변 확대, 축제 운영 시스템 확립, 국제교류 증진 등)을 갖추는 데 주력했다. 11회를 기점으로 앞으로 10년은 글로벌 축제로 도약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이번 딤프에는 9개 나라가 참가했다. 역대 행사 중 참가국 수가 가장 많았다. 폴란드, 인도 등 한국에 한 번도 소개된 적이 없는 나라의 뮤지컬이 무대에 올랐다. 관객들의 반응은 좋았다. 딤프의 밝은 미래가 보였다.
-2013년 2월부터 딤프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동안 주력했던 사업이 있다면.
▶첫째, 조직의 안정화'전문화'체계화를 위해 노력했다. 과거에는 축제가 끝나면 이직하는 직원들이 많았다. 그래서 경험이 축적되지 못했다. 다행히 최근 몇 년 동안 떠나는 직원이 별로 없었다. 사무국 조직도 해외팀, 공연제작팀, 아케데미운영팀 등으로 세분화했다.
둘째, 연중사업을 시작했다. 안정적인 인력 고용과 전문화를 꾀하기 위한 방안이다. 2015년부터 8개월 과정의 '딤프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전국의 뮤지컬 지망생들이 아카데미(작가'작곡가'배우 과정)에서 꿈을 키우고 있다.
셋째, '딤프 뮤지컬 오디션' 프로그램을 2015년부터 시작했다.
이 모든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사무국 직원들 덕분이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딤프 뮤지컬 오디션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이번 대회에는 개그우먼 이경실 씨의 아들 손보승 군이 출전했다.
▶손보승(안양예술고 3년) 군이 뮤지컬 '레미제라블' 중 '장발장의 독백'을 불러 장려상을 받았다. 그날(6월 11일) 경연장(수성아트피아)에서 이경실 씨가 아들을 뜨겁게 응원했다. 손 군의 수상 소식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5위에 오르기도 했다.
딤프 뮤지컬 오디션은 3년 만에 유명세를 타고 있다. 올해는 서울과 수도권은 물론 전국에서 394명이 출전했다. 전국의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대구를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올해 1월 딤프 사무국을 대구삼성창조캠퍼스로 옮겼다. 사무국 이사가 몇 번째인가?
▶딤프 사무국 이전은 딤프 발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2013년 취임 당시 딤프 사무국은 대구문화예술회관에 있었다. 그곳은 원래 의상 보관실이었다. 좁고 환경도 좋지 않았다. 이후 대구경북디자인센터를 거쳐 현재 장소로 옮겼다. 많은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본업이 변호사다. 문화예술인이 아닌데 어떻게 해서 딤프 이사장을 맡게 됐나?
▶어릴 때부터 음악과 연극을 좋아했다. 경북대 법대생 시절, '에쿠스' '아일랜드' 등 연극 작품을 보러 다녔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음악다방에서 온종일 음악을 듣기도 했다. 그때 자주 갔던 곳이 '왕비다방'이었다. 왕비다방에서 자주 마주쳤던 친구가 있다. 그가 소설가 양선규(대구교대 교수)다. 당시엔 서로 "나중에 뭐가 될라 카노?"라고 핀잔을 줬는데….
변호사가 된 뒤 공연장을 자주 다니면서 문화예술인들과 어울리게 됐다. 2009년 대구지방변호사회 회장 재임 시절, 딤프 이사를 맡으면서 딤프와 인연이 됐다. 이사장 제안을 받았을 때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무는 전문가인 집행위원장과 직원들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후원을 많이 받아내고, 조직을 다시 정비하는 게 이사장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대구가 '뮤지컬 도시'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
▶확실히 그렇다. 2014년 인터파크 티켓 판매 통계에 따르면 대구가 유일하게 뮤지컬 티켓 판매 1위였다. 다른 도시의 경우 '대중 콘서트'가 1위를 차지했다. 뮤지컬에 있어선 대구 공연은 흥행 여부의 바로미터다. 그래서 뮤지컬 중 대구'서울, 혹은 서울'대구 공연이 많다.
그리고 세계에서 뮤지컬 단일 장르로 국제공연축제를 개최하는 도시는 대구가 유일하다. 딤프는 이제 글로벌축제가 됐다. 여러 나라에서 참가 신청이 들어온다.
대구 시민들의 관람 문화 수준도 높다. 유명 배우들은 대구 관객을 칭찬한다. 기립 박수를 할 줄 알고, 박수 타이밍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장 이사장은 공연 마니아로 알려져 있다. 기억에 남은 작품은?
▶대구시와 딤프가 공동 제작한 뮤지컬 '투란도트'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 투란도트를 스물여섯 번 봤다.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다. 특히 11회 딤프에서는 의상과 안무가 완전히 바뀌었다. 전 공연의 티켓이 매진됐다.
이 작품은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의 스토리를 바탕으로 한 창작 뮤지컬이다. 음악이 아주 좋다. 투란도트를 맡은 배우 신영숙 씨는 "지금까지 20여 편의 뮤지컬에 출연했는데, 투란도트 넘버(뮤지컬에 나오는 노래)는 세계 어느 뮤지컬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했다.
-변호사보다 문화예술인으로 더 알려져 있다. 본업에 지장이 없나?
▶대구지방변호사회 회장까지 지냈다. "요즘도 변호사 일 하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큰일 날 소리다. 나는 '생계유지형 변호사'다.(이 대목에서 멋쩍다는 듯 웃었다.) 열심히 일하고 돈 벌어야 한다. 그래야 공익활동과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다. 뮤지컬 관련 일은 법적 분쟁(변호사 업무) 속에서 살아가는 내게 힐링이 된다.
-사회 공익 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 계기가 있었나?
▶어머니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셨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변호사가 된 뒤 가장 좋았던 것은 재능기부가 가능한 직업이라는 점이다. 우연찮게 국제로타리에 가입했다. 그 단체가 추구하는 봉사 중 '직업봉사'라는 개념이 있다. 참 마음에 들었다.
-한국문화예술법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시민들에게는 생소한 학회다.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학회다. 지역 출신 교수와 법조인들이 중심이 돼 2011년에 만들었다. 문화예술 분야 법학 발전을 위해 매년 두 차례 학술대회를 열고 있다. 신경숙의 소설에 대한 표절 문제가 제기됐을 때는 '표절'을 주제로 다뤘다. 또 공연 관련 저작권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인 적도 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국제로타리 3700지구 총재를 할 때, 결혼이주여성 친정 보내기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다문화가정과 결혼이주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대구지방변호사회 회장을 하면서 결혼이주여성 지원 변호사단을 만들었다. 이주여성의 이혼 소송 등을 도와줬다.(이주여성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혼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때문에 이주여성에게 이혼 소송은 절박한 문제다.)
그 인연으로 삼성그룹의 지원으로 설립된 (사)글로벌투게더경산의 이사장을 맡았다. 이 단체의 설립 취지는 결혼이주여성의 일자리 창출이다. 현재 경산시 중방동에 꽃집('플라워 이음'), 대구대에 커피숍('카페 이음')을 운영하고 있다. 딤프 이사장 임기가 끝나면 결혼이주여성 지원 사업을 더 열심히 할 생각이다. 변호사로서 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일들이 많다.
-공연 관람 외에 다른 취미는?
▶테니스다. 한 주에 1, 2차례 테니스장에 간다. 내 나이에 다소 무리한 운동인 줄 알지만, 그래도 좋다. 테니스를 계속 즐기기 위해 체력을 연마하고 있다.
※장익현은 누구?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독립운동가 장윤덕(1872~1907) 선생의 증손이다. 장윤덕 선생은 경북 예천, 문경 일대에서 의병을 조직해 일본 경찰과 싸웠다. 일본 수비대에 붙잡혀 모진 고문에도 의병 관련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고, 끝내 총살됐다. 할아버지는 법원 공무원을 하다가 사법서사(현 법무사)를 했다. 이런 집안 환경은 그를 법조인의 길로 이끌었다. 장익현 이사장은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고픈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법대에 진학해 고시 공부를 하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됐습니다."
장 이사장이 중학교 2학년 때, 은행원이던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집안에 대학생이 2명이었다.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대학 진학에 있어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학비 부담이 적은 경북대에 가야 했다, 대학 재학 시절, 사법시험 준비에 전념하지 못했다. 석사 학위 소지자로 공군 학사장교로 뽑혀 중위로 예편했다. 군 복무 중에 결혼했다. 짧은 직장 생활도 했다. 군미필자전형으로 삼성그룹에 입사했으나, 제대 후 복귀하지 않았다. 다시 한전에 입사해 6개월 근무하다 사표를 냈다. 34세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장 이사장은 "학창 시절 많이 힘들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많았고, 방황도 했다.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며 "하지만 질풍노도의 시기에 다양한 경험을 통해 많이 배웠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내게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김교영 선임기자
▷1957년 경북 예천 출생
▷학력=경북고 졸업/ 경북대 법학과 졸업/ 경북대 대학원 행정학과 졸업(석사)
▷경력
-역임: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 합격/ 2007~2008년 국제로타리 3700지구 총재/ 2009~2010년 대구지방변호사회 회장/ 2009~2015년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2010~2015년 대구은행(DGB금융지주) 사외이사/ 2010~2016년 대한변협 인권재단 감사/ 2014~2015년 한국문화예술법학회 회장
-현재 맡고있는 직책: 장익현법률사무소 운영/ (사)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이사장(2013년~)/ 수성문화재단 이사(2010년~)/ (사)글로벌투게더경산 이사장(2012년~)/ 대구시 선거여론조사 심의위원회 위원장(2014년~) /배영학숙(대구보건대) 이사장(2014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대구지부 이사장(2015년~)/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이사(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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