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사만어 世事萬語] '늴리리 만보(漫步)'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 ~그렇게 빨리 가다가는/ 죽을 만큼 뛰다가는/ 아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 고양이 한 마리도 못 보고 지나치겠네.'

퇴근길 차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노래,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의 '느리게 걷자'의 앞부분이다. 편안하지만 가볍지 않다. '빠름의 대명사'인 자동차에서 듣는 '느리게 걷자'는 읊조림은 신선하다.

장석주의 시와 오버랩된다. 이 또한 제목이 '느리게 걷자'다. 시인은 '조금은 무능해지고, 한 끼쯤은 걸러 딱 그만큼만 불행해지자'고 느림과 비움을 예찬한다.

최근 USA투데이에 따르면 한국인은 세계에서 8번째(하루 평균 5천755보)로 많이 걷는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연구팀이 46개국 70만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다. 1위는 홍콩. 홍콩 사람들은 하루 평균 6천880보를 걷는다. 2위는 중국(6천189보), 3위는 우크라이나(6천107보), 미국 사람들은 4천774보로 30위를 기록됐다. 조사 대상국 평균은 4천961보. 연구팀은 도보 횟수는 도시 밀집도, 대중교통 발달 정도, 자동차 보급률, 국민 비만도 등과 관련 있다고 분석했다.

걷기는 건강에 도움이 된다. 우리나라는 좋은 성적을 받았으니 다행이다. 하지만 단순히 많이 걷는다는 결과만 놓고 환영할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 걸음이 일에 쫓기는 속도전의 결과라면?

도시인과 시골 사람의 걸음 속도는 차이가 난다. 대형마트와 시골장터에서 장을 보는 사람들의 걸음을 떠올려보면 공감하리라.

10년 전, 세계 32개 도시의 보행 속도가 발표됐다. 영국 하트포드셔대학 리차드 와이즈만 교수의 연구결과물이다. 18m를 걷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해 평균한 값이다. 싱가포르(10초 55)가 1위였다. 반면 아프리카 말라위의 블랜타이어 주민은 31초60으로 32위를 차지했다. 싱가포르보다 3배 더 걸렸다.

다음은 2위 덴마크 코펜하겐(10초 82), 3위 스페인 마드리드(10초 89), 4위 중국 광저우(10초 94) 등의 순이었다. 경제성장이 빠를수록 걸음이 빨랐던 것으로 분석됐다. 이 조사에서 한국은 아쉽게도 빠졌다. 포함됐다면 메달권에 들었지 싶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는 '월든'에서 "왜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그렇게 필사적으로 서두르고 또 그렇게 필사적으로 사업에 몰두하는가"라고 물음을 던졌다.

우리는 끝없이 경쟁하고, 죽으라고 일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하지만 돈과 명예가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가 아니다. 느리게 걷기(漫步)는 걸음걸이만의 얘기가 아니다. 삶에 대한 성찰이다. 아, 늴리리 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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