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분권은 제도화로 완성된다. 정권교체나 일시적인 여론 변화에 흔들려선 안 되기 때문이다. 불가역적(不可逆的)인 지방분권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선 정치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제도를 만드는 권한을 정치인들이 움켜쥐고 있는 탓이다.
지방분권이 쉽지 않은 이유는 신세를 져야 할 정치를 상대로 혈투를 벌여야 한다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중앙정치로부터 팔과 다리를 잘라 와야 지역정치를 시작할 수 있다. 적어도 지역민의 삶을 규율하는 실질적인 권한이 지역에 있어야 온전한 지방자치가 가능하다. 중앙정부에 집중된 정치권력을 지방정부로 이양해야 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권력이 스스로 자신의 힘을 나눠준 적은 없다. 지방분권의 성패는 정치분권 실현 여부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文 대통령 지방분권개헌 약속 이행의지
지방분권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대한민국 최상위 법체계인 헌법에 지방분권 시행을 위한 각종 제도적 장치를 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국시도의회의장협의회, 지방분권개헌국민행동,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등 10개 단체로 구성된 지방분권개헌국민회의 대표단은 지난 4월 27일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지방분권개헌 국민협약'을 체결했다. 헌법개정안 발의권자인 대통령에 당선되면 지방분권개헌에 적극 나서겠다는 약속을 받아 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14일 전국 17개 광역지방자치단체장들과 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연방제에 버금가는 강력한 지방분권제를 만들겠다"며 "내년 개헌할 때 헌법에 지방분권을 강화하는 조항과 함께 제2국무회의를 신설할 수 있는 헌법적 근거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문 대통령이 공약 이행 의지를 보임에 따라 지방분권형의로의 개헌 가능성은 한층 높아졌다. 이에 지방분권개헌국민회의는 지방분권개헌안을 마련하고 정치권 설득에 나섰다.
청와대의 호의적인 분위기와 달리 국회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국회의원의 특권 또는 권한을 제한하거나 국회의 권능을 지역과 나누는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불쾌감마저 표시하고 있다.
◆칼자루 쥔 현직 국회의원, 밥그릇 방어 나서
현역 국회의원의 심기를 건드린 내용은 ▷국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하고 상원은 지역대표로 구성하고 하원은 국민대표로 구성한다 ▷헌법기관에 책임을 묻는 국민소환제를 도입한다는 조항이다.
지방분권개헌국민회의는 국가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하원과 지방의 이익을 대변하는 상원이 상호 견제하도록 함으로써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의 자치권을 일방적으로 침해하는 것을 방지하고 지방의 자치권을 방어하는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울러 국가 전체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지방의 참여를 보장하기 때문에 중앙정부와 지방 간의 수직적인 권력 분립도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김형기 지방분권개헌국민행동 상임의장(경북대 교수)은 "기존 국회의원으로 구성되는 하원과 달리 상원은 지역 간에 동등한 참여를 보장하거나 인구가 적은 지역에 인구가 많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대표성을 인정함으로써 대규모 지방과 소규모 지방 간의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은 국가적 의사결정을 지체할 가능성이 크고 상원이 옥상옥(屋上屋) 역할을 하면서 기존 국회의원의 위상이 축소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관계자는 "상원과 상원의원의 권한을 어디까지로 규정할지를 두고 사사건건 상하원이 마찰할 수도 있다"며 "인구 5천만 명 규모의 단일민족국가에서 굳이 양원제를 운용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국회의 개헌안 손질 과정이 관건
또 지방분권개헌국민회의는 국회가 국민과 동떨어진 결정을 하거나 작동하지 않고, 개선의 가능성도 없는 경우에 최종적인 주권자의 결정으로 국회의원을 임기 전에 소환할 수 있도록 하는 국민소환제도를 헌법에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은 대의제의 근간인 책임정치가 흔들릴 수 있고 정치적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다며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결국 현직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밥그릇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의 지방분권개헌을 바라고 있다. 이에 대한 교통정리가 미진할 경우 자칫 개헌안의 국회 논의 과정에서 지방분권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제외한 선언적 조항들만 채택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향후 개헌 논의는 국회가 주도할 전망이기 때문이다.
정치권 관계자는 "결국 칼자루를 쥔 쪽은 개헌안을 최종적으로 손질할 국회의원"이라며 "무턱대고 몰아붙이기만 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타협안을 모색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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