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일 만에 11조원 추경안 통과
국민 알 수 있도록 공론화 부족
지금은 증세 문제를 본격 논의
과세에 대표있음을 보여줘야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말은 미국 독립전쟁을 촉발시킨 구호인데, 최근 정국을 보면서 문득 떠올랐다. 지난주말 추가경정예산(이하 '추경')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는데,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여당 의원 26명이 국회에 불출석한 것을 보고 과연 우리에게 대표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야당이라고 나을 것도 없다. 다른 정치 쟁점과 연계해 예산 심의를 보이콧하더니 속성으로 추경을 통과시키는 데 일조했다. 본격적으로 증세 논의가 시작되는 이 시점에 다시 한 번 우리의 '대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서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말이 터져 나온 것은 영국의 일방적 과세 때문이었다. 영국 의회가 1765년의 인지세법과 1774년의 관세법을 일방적으로 통과시켜 미국인들의 분노를 초래함으로써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원래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말은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통용되기도 전인 1215년 영국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최초의 근대헌법으로 일컬어지는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대헌장)에 이 문구가 명기된 이래 조세법률주의는 민주주의의 초석이었음에도 영국 정부가 이를 무시했던 것이다.
지난주말에 45일간의 갑론을박 끝에 국회에서 11조333억원 규모의 추경이 통과되었다. 경기침체에 가뭄과 홍수까지 겹쳐 민생이 답답하던 차에 추경 통과는 시원한 소식으로 전해졌다. 45일이 길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2000년 이후 추경 통과 기간이 평균 37일이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크게 긴 것도 아니다. 문제는 추경 심사를 제대로 했는가 하는 점이다. 추경안이 국회에 제출된 후 38일 동안 방치되었다가 1주일 심의한 후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예산안 방치의 일차적 책임은 여당 대표가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정치공세에 나선 데 있었고,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인사청문회와 추경을 연계시켜서 38일이 그냥 지나갔다. 그 후 1주일 만에 통과되었는데, 이런 부실 심의의 연장 선상에서 예산안 표결에 불참한 여당 의원들만 나무라기도 머쓱하다. 원래 추경은 전쟁, 자연재해, 심각한 불황 등 위기 상황에서 편성하는 예산인지라 더욱 세심하게 심의해야 마땅함에도 이 모양이었다.
심의기간이 짧다고 해서 무조건 졸속은 아니다. 실제로 짧은 기간임에도 국회는 1조2천억원을 삭감하여 중앙직 공무원 증원 규모를 2천 명 감축시켰고, 증원 추진비 80억원을 삭감하여 공무원 증원에 대한 재논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또 국회 차원에서 가뭄대책에 1천억원, 평창올림픽 지원에 500억원 등 1조1천억원을 증액하기도 했다. 공무원 증원을 통한 일자리 창출에 타당성 문제를 제기한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명제를 만족시키기에 우리 국회는 준비가 부족했다. 국회의 심의는 국민이 알 수 있도록 공론화를 전제로 준비하고 추진될 필요가 있음에도 야당이 아무런 대안을 내놓지 못해 논쟁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나아가 예산 옴부즈맨 등을 통해 국민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여 논쟁을 활성화해야 함에도 이번 추경 심의과정에서 여당은 물론 야당도 충분히 논의를 조직화하지 못했다.
이제 바야흐로 추경보다 더 중요한 증세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이번에야말로 야당들이 제 목소리를 내 주길 간절히 바란다. 선거 전에 증세를 주장하는 정치인은 제정신이 아니라고들 말하지만, 선거 후에도 증세를 추진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문재인정부와 여당이 높은 지지율에 힘입어 과감하게 증세의 빗장을 열었다. 그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낸다. 야당도 미래지향적으로 논의를 조직화하여 진지한 증세 논쟁을 통해 우리의 과세에도 대표가 있음을 실감할 수 있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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