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의 시간/ 후지이 가즈미치 지음/ 염혜은 옮김/ 눌와 펴냄
지구의 역사는 약 46억 년이다. 암석은 40억 년 전에 형성됐고, 단세포 박테리아가 출현한 건 38억 년 전 정도로 추정된다. 암석이 풍화침식 작용과 미생물의 분해를 거쳐 흙이 된 것은 5억 년 전이다.
46세 된 지구가 5년 전에 텃밭을 만들었고, 1년 반 전부터 반년 전까지 그곳에서 공룡이 놀았으며 호모에렉투스는 5.5일 전에 태어났다는 얘기다.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신석기를 1만 년 전이라고 하니 인류가 그 텃밭에서 농사를 짓고 본격적으로 활동한 건 1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바윗돌 깨트려 돌덩이/ 돌덩이 깨트려 돌멩이/ 돌멩이 깨트려 자갈돌/ 자갈돌 깨트려 모래알'이 흙이 되기까지 35억 년이 걸렸다. '흙의 시간'은 그 뒤의 이야기다. 흙의 탄생부터 현재, 그리고 적응과 파멸의 갈림길에서 선택할 미래를 아우른다. 5억 년간 흙과 생물이 주고받은 대화의 기록이다. 일본 삼림종합연구소 연구원 후지이 가즈미치가 일본, 인도네시아와 태국의 열대 우림에서부터 캐나다 영구동토 등을 돌아다니며 그의 손을 거친 흙을 풀어냈다. 책은 흙을 주제로 했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필사적으로 흙과 공생해 온 식물, 동물, 미생물과 인간이 주인공이 아닐까 싶다.
흙은 지구에만 있다. 달과 화성에도 '레골리스'(regolith)라는 퍼석퍼석한 돌가루가 있지만, 이건 흙이 아니다. 흙은 부스러진 바위가루인 무기물과 동식물이 썩으면서 생긴 유기물이 섞여 상호작용한 결과다. 생물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기에 흙과 생명은 불가분의 관계다. 5억 년 전 바위에 붙어 있던 이끼와 지의류가 양분을 얻고자 방출한 유기산이 모래와 점토를 만들었고, 이들이 섞여 흙이 만들어졌다. 이끼와 지의류의 '고군분투'는 1억 년 동안 계속된다. 양치식물이 땅에 자리 잡을 때까지. 4억 년 전 축축한 지대를 주름잡던 양치식물은 죽어서 흙 속에 파묻혀 쌓여 석탄의 원형인 이탄토를 만든다. 식물과 미생물의 노력은 대지를 만들었다. 습지를 중심으로 번성한 양치식물이 쇠퇴하고 겉씨식물이 등장한다. 단단한 줄기를 가진 나무가 생기면서 '리그닌'이 축적된다. 딱딱하고 맛없는 식물 유해의 등장에 미생물은 분해를 포기한다. 분해속도를 뛰어넘은 퇴적 속도에 대규모 석탄 축적 시대, 석탄기가 도래한다. 하지만 맛없는 리그닌을 먹고사는 버섯이 진화하면서 석탄기는 종언을 고한다. 2억 년 전 쥐라기 초식공룡의 밥상에는 침엽수가 올랐다. 온난 습윤한 환경 덕에 아열대 침엽수림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번성한 아열대 숲 식물은 물을 흡수하며 칼슘'칼륨 이온을 흡수하는 대신 수소 이온을 방출해 이때부터 흙은 급속도로 산성화된다. 흙이 식물을 변화시키듯, 식물도 흙을 바꿨다.
산성비, 질소비료 사용이 토양 산성화를 촉진한다고 한다. 저자는 다른 시각에서 산성토양을 본다. 산성토양에서 생물이 적응하는 방식이 그들의 생존을 결정하고, 토양환경을 다시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예컨대 산성토양이나 양분이 극히 적은 토양에 사는 식충식물인 벌레잡이통풀은 곤충을 포획'소화'흡수해 영양 결핍을 보충한다. 흙의 양분을 가져가려고 나뭇잎을 잘라다가 버섯을 키워 그 균사를 먹고사는 가위개미나 흰개미도 있다. 특수한 소화기능이 생기고, 종이 다양해진 것도 적응의 결과다.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흙을 먹고사는' 인류의 출현은 흙에 위기를 가져왔다. '닫힌계'에서 순환하는 다른 생태계와 달리 인류는 식물과 미생물이 저장해둔 흙 속 양분을 빠른 속도로 소비했다. 산성토양을 중화하고자 화전농법을 개발했고, 몬순기후에 적응한 벼를 재배하며 흙을 최대한 이용한다. 토양 양분의 고갈과 비료 자원의 결핍 문제를 똥'오줌으로 해결한 것도 인간이었다. 자꾸 용출되는 질소를 보충하려는 노력은 대기 중 질소에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하버-보슈법'을 발명하게 했다. 하버-보슈법은 천둥번개나 콩류에 의존해 고정되던 질소를 비료로 고정해 토양에 대거 공급할 수 있게 했다. 인간이 물과 석탄과 공기를 가지고 빵을 만들 수 있게 되면서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저자는 식량 증산과 인구 증가가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하면서 조심스레 경고한다.
에너지 소비량의 증가는 화석연료를 고갈시키고 지구 온난화를 앞당긴다. 인공림 조성 속도보다 빠른 벌채, 달콤한 차와 맛있는 우유를 먹으려고 뿌린 비료는 땅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저자가 흙 이야기를 꺼낸 건 이 때문이다. 흙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가혹한 시간을 견뎌낸 생물들의 생존전략과 선조의 지혜를 빌려야 한다. 콘크리트로 뒤덮인 지면, 모래 대신 우레탄으로 포장된 놀이터, 깨끗하게 씻겨 포장돼 진열된 채소가 말해주듯 우리는 흙과 점점 멀어졌다. 흙에 묻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는 흙과 생명의 연결고리를 다시 확인하는 데서 시작한다. 268쪽, 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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