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어른과 어린이, 현실과 꿈의 사이에서

전 MBN 앵커
전 MBN 앵커

그즈음 대한민국 국회는 정쟁의 한가운데 있었다. 추경안에 대한 논쟁으로 한 달이 넘도록 여야는 극한 대립 상태를 이어갔다. 정치권의 무거운 분위기를 반영하듯 하늘엔 당장에라도 쏟아질 것 같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장마철의 후텁지근한 날씨에 불쾌지수까지 치솟던 7월 14일, 그런데 국회의사당 한편에서는 싱싱하고 힘찬 기운이 느껴졌다. 그곳엔 무채색의 양복 무리 대신 형형색색의 밝은 옷을 예쁘고 멋지게 차려입은 초등학생들이 가득했다.

"여러분이 여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희망차리라 믿습니다. 어린이국회 체험을 통해 꿈을 키우고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헌신을 배우는 소중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정세균 국회의장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대한민국 어린이국회'가 열렸다. 올해로 13회째를 맞는 '어린이국회'는 아이들이 민주주의를 체험하고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과 미래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매년 단 하루 열리는 '어린이국회'에 너무 거창한 시행 취지를 갖다 붙인 것은 아닌지, 피식 웃음이 났다.

150여 명의 어린이들이 전국 250개 초등학교를 대표해 '국회의원'이라는 배지를 달고 국회에 출석했다. 가상의 신분으로 진짜 대한민국 국회에 참석해서인지 어린 의원들의 표정엔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런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너무 귀여워서, 당장에라도 가서 볼을 꼬집어 주고 싶었다. 요 꼬맹이들이 국회의원 역할을 얼마나 그럴싸하게 수행해낼지 나는 무시 반 기대 반으로 회의를 지켜봤다.

하지만 '흉내 내기'에 그칠 것이란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엄숙하고 진중한 분위기 속에 진행된 '어린이국회'는 큰 울림을 남겼다. 호통과 고함, 비아냥으로 진행됐던 대정부 질문이 '어린이국회'에서는 달랐다. 연단에 오른 어린 의원들은 당찬 목소리로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창의적인 대안까지 마련해 제시했다. 파행을 거듭하고 서로 막말을 주고받던 상임위원회가 '어린이국회'에서는 치열한 토론을 통해 표결의 합의 과정을 이뤄냈다. 정치인들이 항상 강조하지만 '어른국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상생, 협치, 합의, 국민이 '어린이국회'에는 존재했다.

물론, 현실 정치에서 기대하기 힘든 장면이란 것은 안다. '어린이국회'를 '어른국회'와 비교한다는 것이 유치한 발상이란 것도 알고 있다. 며칠 전 방송된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김영하 작가는 "민주주의에서 당은 갈등을 조직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갈등을 사갈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국회의원은 현장의 갈등을 반영해 국민을 위해 싸우라고 국회에 보내진 것이라 설명했다. 싸움만 하는 동물국회, 파행만 하는 식물국회에 대한 비난도 있지만 정치 싸움은 정당하고 때론 필요하다는 뜻이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민주주의란 원하는 것을 다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며 정치는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치열한 '진영 싸움'을 하는 행위라고 강조했다.

정치의 원론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어진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의 의견에 더 기대고 싶은 것은 욕심일까. 정 교수는 "그동안 우리는 갈등을 조직화하기만 했기 때문에 논리적 토론을 통해 타협으로 가는 길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라며 경청하고 양보하는 과정을 통해 솔루션을 찾아가는 토론이 이뤄지는 정치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자신의 전문 분야인 과학을 얘기할 때와 달리 본인도 실현 불가능한 '바람'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지,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긴 했지만….

'어른국회'와 '어린이국회', '현실 정치'와 '꿈의 정치' 사이에서 오락가락한 날씨만큼이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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