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5년 뒤 홍수가 나든 말든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민주주의를 혐오했다. 그들이 누군가를 비난할 때 쓴 단어가 '민주주의' '민주주의자'였다. 그들은 왕이 통치하지 않는 '공화주의'를 추구했다. 하지만 이는 대중이 직접 통치자를 뽑는다는 의미의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그들이 건설하고자 한 것은 공평무사하게 판단할 학식과 능력을 갖춘 '고매한 신사들의 통치'였다.

그들이 민주주의를 배격한 이유는 대중이 너무나 무지해서 자기들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다수의 이익과 다중의 혼돈이 소수의 좀 더 높은 차원의 생각을 완전히 압도해버리는' 체제였다. 이런 인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 미국 제4대 대통령으로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의 말이다. "민주주의는…국민의 시야를 좁혀버리며, 따라서 국가적인 거대한 목적을 이해하고 추구할 능력이 없는 지도자와 시민을 생산한다."('민주주의의 삶과 죽음', 존 킨)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엘리트주의자의 망발이겠지만. 대중민주주의가 품고 있는 '무책임의 정치'를 간파한 혜안임은 부정할 수 없다. 대중민주주의에서 대중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설사 그것이 국가를 파탄 낼 독(毒)이어도 마땅히 따라야 할 '국민의 뜻'으로 둔갑한다. 이런 무책임의 정치는 현 세대를 위해 미래 세대를 희생시키는 '미래 착취'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문재인정부가 쏟아내는 각종 정책은 이를 기반으로 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앞으로 5년 내에 전기요금은 올리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10년, 20년, 30년 뒤가 아니라 '5년'이다. 현재 전력 수급 사정을 보면 그렇게 해도 된다. 이명박'박근혜정부 때 발전소 건설에 투자를 늘린 덕분이다. 그래서 5년만 살고 말 거라면 필자 같은 무지렁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문 대통령의 '탈(脫)원전' 구상이 실천되면 발전 설비는 15%나 감소한다. 전기요금은 오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문정부의 반박은 두 가지다. 경제성장 둔화로 전력 수요가 준다는 게 그 첫 번째다. 예측이 다 그러하듯 경제 예측도 맞는 경우보다 틀리는 경우가 더 많다. 철학자 칼 포퍼가 말했던 "미래를 알려면 미래의 지식을 알아야 하는데 설령 그것을 안다 해도 그때 지식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지식이 되어버리는" 인간 지식의 한계 때문이다. 그래서 예측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문정부의 예측은 매우 위험하다.

두 번째는 감소하는 전력 설비를 메울 신재생에너지 단가가 2022년 이후부터 하락한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전혀 없다. 재미 있는 것은 2022년은 문정부 임기 마지막 해라는 점이다. 신재생에너지 값이 문정부가 원하는 대로 임기 종료와 함께 알아서 떨어지게 돼 있는 모양이다.

공무원 17만4천 명을 더 뽑는 계획도 마찬가지다. 문정부는 그 비용은 앞으로 5년간 21조원이면 된다고 했다. 역시 중요한 것은 앞으로 10년, 20년, 30년 뒤가 아니라 5년이다. 비용도 어떤 셈법인지 21조원→16조원→8조원으로 계속 낮췄다. 진실은 5년간 21조원(아니면 16조원이든 8조원이든)이 아니라 30년간 231조3천억원이다. 국회예산정책처의 공식 발표다. 이 돈을 대느라 우리 후손은 허리가 휠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장기 소액 연체자의 원금 100% 탕감 등도 그렇다. 더없이 따뜻하고 인간적인 정책이다. 하지만 그 뒤에는 영세 자영업자의 몰락 가능성, 고용 안정이 아니라 고용 축소, 탕감을 기다리면서 빚을 갚지 않고 버티는 도덕적 해이라는 부작용이 도사리고 있다. 모두 미래에 큰 짐을 지우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완 대책은 문정부에 없다. 프랑스 왕 루이 15세는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에 "다음에는 태자(루이 16세)가 잘해주겠지. 나 죽은 다음에 홍수가 나든 말든 알 바 아니지"라고 했다. 문정부의 행태가 딱 그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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