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보조개 사과

몇 년 전까지 우리 집에서는 수박 농사를 지었다. 30년 넘게 수박 농사짓는 집 아들이었지만 나는 수박 순을 치는 것 같은 고급 기술은 배우지 못하고 거적 열고 덮고, 수박 나르는 일밖에 하지 못했다.(내가 농사일을 잘 못하기도 해서 부모님께서 많이 시키지도 않으셨다.) 가끔씩 수박을 나르다가 꼭지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는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수박이 아무리 크고 잘 익었어도 꼭지가 떨어지면 하자가 있는 것으로 취급되어 제값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꼭지가 없다고 해서 품질이 떨어지는 게 아닌데, 단지 보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불량품 취급을 받는 것은 농사짓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기도 했다.

지난 6월 영주에서는 우박이 내려 작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우박을 맞은 사과들은 품질에는 큰 차이가 나지 않지만 군데군데 흠이 생기고 못생겨서 꼭지 떨어진 수박보다도 값을 받지 못한다. 농가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농협에서 '보조개 사과'라는 이름을 붙여 팔기 시작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참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비자들 입장에서는 약간의 흠이 있지만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고,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버려질 뻔한 과일들을 팔 수 있으니 참 다행한 일이다.

이것을 보면 말이 가진 힘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김춘수의 시 '꽃'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말한 적이 있는데, 우리가 어떤 말을 사용하고, 어떻게 말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별난 사람'과 '독특한 매력을 지닌 사람'은 따지고 보면 같은 사람이다. '통치 철학을 같이하는 사람을 등용'하는 것과 '코드 인사'도 같은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별난 사람', '코드 인사'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어떤 말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태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우박 맞은 불량 사과'라고 하면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사료나 퇴비로밖에 쓸 수 없는 것 같지만, '보조개 사과'라고 하면 다른 사과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과 함께 못생긴 모양이 귀여운 느낌까지 든다. 불량 사과라고 할 때는 공짜로 줘도 먹지 않을 것 같은데, 보조개 사과는 반값에 산 것이 큰 이득을 본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말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사회에서는 부정성을 극대화하는 말을 너무 쉽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제도 먹었던 달걀을 갑자기 먹으면 바로 죽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살충제 달걀'이라고 하고, 세금을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좀 더 내라고 하는 것도 세금 때문에 죽을 것 같은 '세금 폭탄'이라고 한다. '보조개 사과'처럼 우리 사회의 긍정성을 좀 더 끌어내기 위해서는 말의 선택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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