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어머니의 체불 임금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박사. 휴먼앤북스 대표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박사. 휴먼앤북스 대표

1929년생인 어머니가 풍으로 쓰러진 것은 3년 전이다. 종합병원에서 한방을 겸한 치료를 몇 달간 받으니 많이 호전되었다. 하지만 나이는 어쩔 수 없는지 이후 조금씩 모든 것이 불편해지셨다. 식사량이 주니 힘이 없고, 힘이 없으니 혼자서 화장실 가기도 힘들어지셨다. 정신은 온전하긴 하지만 가끔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하시기에 황당해질 때가 있다. 가령 갑자기 소머리국밥이 드시고 싶다며, 병원 모퉁이를 돌아가면 정말 맛있게 하는 집이 있으니 얼른 사오라는 것인데, 분명히 없는데 왜 저러실까 하고 긴가민가해서 가보면, 과일가게밖에 없는 것이다. 이럴 때는 멀리 차를 몰고 가서 사오는 수밖에 없다. 내 어릴 때 얼마나 많은 맛있는 것을 해주셨는가. 이 정도 수고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런 일이 몇 번 이어지면서 어머니의 머리 회로 속에 어떤 것이 착종되어 고착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위치 감각은 퇴화하고 어느 맛있는 음식의 기억이 바로 그때의 위치에서 기억의 회로를 통해 재생되는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에는 어떤 것이 어머니의 상상으로 등장할까 하고 자못 흥미진진할 때도 있다.

지난 일요일 부추전과 감자전을 부쳐 갔더니 맛있게 드시면서, 지금부터 연필 꺼내서 받아 적으라고 하셔서 순간적으로 긴장을 했다. 재산 상속이야 내가 외아들이니 이미 다 끝났고, 49재 올려달라는 것도 다 말씀하셨고, 술 좀 그만 먹으라는 것도 누누이 말씀하셨으니 새삼 유언이 있을 리가 없는데, 무슨 기발한 말씀일까 하고 좀 기대하면서 스마트폰 펜을 꺼내 들었다. "텔레비전에 누가 나와서 옛날 돈을 다 준다니 꼭 이자 쳐서 다 받으라"는 말씀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하다가 좀 듣고 있으니 어머니 입장에서 충분히 하실 수 있는 말씀이었다.

내용인즉슨, 처녀 때 죠오(징용)를 갔다는 것. 15살부터 17살까지 대구 칠성동에 있는 그물 공장에 징용을 갔고, 월급은 저금인가 뭔가를 한다고 주지 않았고 대신 용돈으로 30전을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어릴 때 들은 이야기로 지금도 기억을 한다. 다른 아이들은 주전부리를 했는데 당신은 그 30전도 아껴서 모았으니, 너도 용돈 아껴 써라 할 때 단골로 등장한 레퍼토리 중의 하나였으니 내가 기억 못 할 리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새로운 말씀이 추가되었다. 공장에서 당신 이름이 가네야마 헤키센이었고, 감독이 하야시 센세이였고, 선산 무을 사람이 많이 끌려왔다는 것 등이다. 어머니 이름이 한자로 金璧仙(김벽선)이니 일본어로 그렇게 발음되는지 모르겠다.

종합하면 1943년부터 1945년 7월까지 공장에서 일을 했고, 45년 7월에 이름이 순이라는 동무와 감시망이 느슨할 때 탈출을 해서 걸어서 대구에서 칠곡군 약목까지 가셨다는 것(겨우 17세 소녀가!), 약목으로 마중 나온 외할아버지를 만나 선산읍 완전동 집으로 돌아가 혹시 잡으러 올까봐 골방에 숨어 있었는데, 한 달 후에 8'15해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외할아버지가 일본으로 징용 간 삼촌도 돌아올 것이라며 그렇게 신명나게 북을 치며 만세를 불렀다는 것인데, 외할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어머니도 처음 보았다는 것이다.

메모를 하다가 나는 잠시 멍해졌다.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의 현장을 본 것 같기도 했고, 최근 상영한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도 하면서, 어머니와 외할아버지와 같은 민초들이 온몸으로 겪은 세월의 한 자락이 전율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단디해서 꼭 받으래이."

어머니는 아들이 슈퍼맨이나 대통령인 줄 안다. 내가 어머니의 유언을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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