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황제 납시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1909년 대구를 찾았다. 임금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대구역에서 내린 순종은 가마를 타고 경상감영으로 행차했고 닷새 뒤 마산'부산 순행을 마친 뒤 환궁 길에 다시 대구에 들러 달성공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황제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주요 행사 때 입는 의전복인 대례복이 아니라 군복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황제 옆에서 목에 잔뜩 힘을 주고 서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도 눈에 거슬렸다.

사실, 순종의 대구 방문은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고 독립운동 의지를 꺾기 위해 일본이 기획한 이벤트였다. 대구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황국 신민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며 일장 연설을 해 댔다. 순종은 사실상 들러리였다. 순종의 달성공원 방문 목적도 통탄할 일이었다. 당시 달성공원에는 일본거류민회가 1906년에 지은 황대신궁(皇大神宮) 요배전(遙拜殿)이 있었다. 요배전은 문자 그대로 '멀리서 일왕에게 절을 하는 곳'이다. 행사의 실체를 미리 간파한 당시 대구의 학생들이 행사를 저지할 계획까지 짜는 등 항거한 것과 달리, 순종은 굴종을 택했고 꼭두각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처럼 뼈아픈 역사가 지자체에 의해 '순종 황제 어가길' 사업이란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다. 요배전이 있던 달성공원의 정문 앞에는 순종의 동상도 세워졌다. 대례복 차림의 5.5m 높이 금빛 순종 동상은 위엄 있고 자애로운 이미지를 풍긴다. 사전 지식이 없다면 순종이 나라와 백성을 걱정했던 성군이라는 착각이 들게 만들 만한 조형물이다. '백성들에게 희망의 다리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표현했다'라는 설명문은 보기에도 민망스럽다.

순종 황제 어가길 사업에는 무려 70억원의 혈세가 들어갔다. 취지를 봐도, 결과를 봐도 역사 왜곡과 친일 미화 논란에 휩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대구 중구청은 '다크 투어리즘'(비극적인 참상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나 재앙의 장소를 실제로 돌아보는 여행)이라는 해명을 내놨다. 순종 황제의 대구 방문을 통해 굴욕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겠다는 것인데 궁색하게 들린다. 다크 투어리즘의 대명사 격인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난징학살기념관 등을 제대로 벤치마킹할 생각이라도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순종 황제 어가길 사업에서 지자체의 과욕과 헛발질이 느껴지는 것은 어디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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