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광수 교수님 제자인데…."
1990년대 초반, 술자리나 모임에서 수시로 마광수 교수를 들먹이는 친구가 있었다. 연세대를 졸업했다는 이유만으로 제자라고 하긴 그렇지만, 마 교수의 수업을 한 번 들었다고 주장하니 그런가 보다 했다. 그 친구가 마 교수를 끄집어내면 좌중의 관심은 그의 입에 쏠렸다. "마 교수가 성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는데…." 호기심 가득한 청년 때여서 그런지 몰라도, 모두 귀를 세워 그의 말을 경청하곤 했다.
마광수는 1989년 에세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낼 때만 해도 스타 교수이자 인기 작가였다. 한국에서 성적 담론을 제기한 선각자(?)로 대우받았고, 그의 강의에는 청중이 구름같이 몰렸다. 1991년 소설 '즐거운 사라'로 검찰에 의해 전격 구속되면서 그의 삶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빛나는 것은 순간이었고, 평생 외설 교수, 변태 교수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으니 힘들고 괴로웠을 것이다.
마광수는 흔히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쓴 데이비드 H. 로렌스(1885~1930)와 비교되곤 했다. 한국 문단에서는 둘의 문학성 차이를 들어 '턱도 아닌 소리'라는 반응이 대부분이겠지만, 삶의 고단함에 있어서는 무척 닮아 있다.
'외설 작가' 로렌스는 1928년 영국에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출간할 곳이 없어 이탈리아 피렌체로 건너갔다. 영어를 모르는 식자공에게서 자비로 100부만 찍었다. 지인들에게 2파운드씩 받고 팔다가 소문이 퍼져 해적판으로 유통되면서 불후의 명작이 됐다. 로렌스는 45세 때 폐결핵으로 죽을 때까지 가난과 싸우며 불우하게 살았다. 외설 시비로 오랜 재판을 거쳐 미국에선 1959년, 영국에선 1960년에 완본 출판이 허용됐다. 생전에는 고생만 하다가 죽은 지 30년 뒤에야 세계적인 작가로 복권됐으니 어찌 보면 참으로 허망한 인생이다.
마광수 자신의 표현대로 '거지발싸개 같은 한국'에서 그만큼 욕을 먹은 문학가도 없을 것이다. '높으신 분들, 하느님 찾는 분들, 엘리트님들이 낮에는 근엄한 목소리로 마광수 죽여라 해놓고 밤에는 룸살롱에 간다.' 한국 사회의 이중적 잣대는 1990년대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현재에도 마광수 수준의 성적 담론을 입에 담으려면 매장을 각오해야 한다. 마광수가 무딘 신경과 끈기로 모욕과 냉대를 견뎌냈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그렇지 못했으니 그것도 운명이 아니겠는가.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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