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김징완 사장님. 다들 그리 생각하시는지요…"
인터넷 카페 거사모(거제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첫 문장이다. 삼성중공업이 있는 거제도와 한국 조선업의 위기 상황을 반영하듯 카페는 상당 기간 업데이트를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삼성중공업 임직원들에게 김징완(71) 전 대표이사 부회장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슴속에서 솟구쳐 생각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김 부회장은 한때 세계 1위를 자랑하던 한국 조선업의 위기에 대해 내외부적 요인이 복합되면서 악화된 것으로 분석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성장세가 꺾이면서 물동량은 줄어들고 원유가격도 하락했습니다. 따라서 각종 선박의 발주가 취소되는 등 조선경기의 침체가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국내의 생산능력은 커지고 중국도 생산력을 크게 키웠습니다. 더 큰 문제는 국내 조선사들 간의 제 살 깎아 먹기 경쟁이 더욱 치열해진 것입니다. 상당 기간 해법을 찾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 부회장이 만성적자 회사인 삼성중공업을 세계 1위 회사로 키웠던 시기와 지금은 분명 시장 상황이 다르다. 그러나 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이를 토대로 한 획기적 발상의 '도약'과 현장중심 경영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리더십은 그때나 지금이나 절실하기는 마찬가지다. 세계 1등을 향한 김 부회장의 꿈과 인생 이야기를 서울 테헤란로 개인 사무실에서 들어봤다.
◆지독하게 공부하는 아이
김 부회장은 1946년 달성군 현풍면 하동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교 졸업 때까지 수학여행은커녕 인접한 대구 나들이조차 한 번 해보지 못할 만큼 가난했다. 어린 시절부터 가장 큰 고민이자 목표는 어떻게 하면 '이 가난을 벗어던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마 중학교 2학년 때쯤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집을 나서면 비슬산 꼭대기에 큰 바위가 보이는데요. 교과서에 '큰 바위 얼굴'이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비슬산 큰 바위를 보며 '이왕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하는 사람이 되자'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중에 저의 호가 '현암'(玄巖'현재 김 부회장은 현암장학회를 설립, 이사장을 맡고 있다)이 되었습니다."
행정고시에 합격해 관료로 성장한 뒤 대통령이 되는 길과 언론인으로서 사회에 기여하는 길을 고민하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이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공부밖에 없었다. 서울의 일류대학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꿈'에 접근할 방법조차 없었기에 간절함은 더했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 또 불합격이었다.
"3수를 하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는 '촌동네에서 어떻게 명문대학에 갈 수 있겠노'라며 '정신 나갔다'고 말렸습니다. 그 당시 저는 안되면 늙어 죽을 때까지라도 도전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형편상 공부에 전념할 수 없었다. 낮에는 토끼, 염소, 소, 닭 등을 키워 생활비를 벌고, 밤에 호롱불 밑에서 공부를 했다. (김 부회장의 집은 가난해서 전기를 들여올 수 없었다) 호롱불보다 차라리 집 옆에 설치된 가로등 밑이 더 밝아 가로등 밑에 서서 책을 보기도 했다.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궁리 끝에 동네교회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 낮에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밤에라도 집중해서 공부해야 하는데 전깃불이 없어 효율이 오르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제가 목사님을 대신해 새벽 5시에 교회 종 치는 일을 하겠습니다."
군대 입영 영장을 받아 들고 삼수를 한 김 부회장은 이렇게 노력한 끝에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지금도 현풍 고향 사람들은 '참, 지독스럽게 공부하던 아이'로 김 부회장을 기억하고 있다.
◆"삼성, 뭘 하는 곳인지 몰라요!"
입학 후 한 학기를 마치고 군대를 다녀온 김 부회장은 또 공부에 '올인'했다. 장학금을 받아야만 대학을 다닐 수 있었기에 전공 공부를 해야 했고, 대통령 꿈을 위해서는 일단 행정고시에 합격해야 했기에 행정고시와 관련된 행정학, 법학, 경제학, 경영학, 사회학, 심리학 등 다양한 과목을 수강했다. 동기들 사이에 "제는 도대체 뭘 전공하고 있노?"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물론 자취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인 4역이었던 셈이다.
"대학 졸업반 10월이었습니다. 두 번의 행정고시에 실패하고 도서관에서 두 달 남은 세 번째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삼세번에 강하니 이번에는 반드시 합격한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삼성 입사지원서를 가지고 와서 '재미 삼아 한번 해보자!'고 부추겼습니다. 다른 부분은 자신들이 다 썼으니까 서명하고 도장만 찍으라고 해서, 삼성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경제학 전공으로 삼성 입사시험을 치렀지만, 이미 행정고시 준비를 상당히 한 상태라 별 무리가 없었다. 사건은 3배수로 치르는 삼성회장단 면접에서 터졌다. 사회자의 첫 공통질문은 "왜, 삼성에 지원하게 되었느냐?"였다. 미리 준비를 철저히 한 경쟁자들은 삼성의 창업이념과 경영방침 등을 열거하며 그럴듯한 답변을 했다. 그런데 김 부회장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삼성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어차피 목표는 삼성이 아니라 행정고시니까 솔직해지기로 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회사라는 것밖에, 삼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이왕 직장생활을 할 것이면 큰 회사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지원했습니다."
이번에는 면접관이 "사학과를 나와서 경제학이나 법학을 전공한 사람들과 경쟁할 수 있겠나?"라며 과(科)를 폄하하는 질문을 했다. 안 그래도 마뜩잖은 마당에 화를 돋운 발언이었다.
"질문하시는 분이 뭐하시는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학교육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제가 공부를 좀 해봐서 아는데, 대학 4년 동안 전공 공부를 한다고 해봤자 그저 말귀를 알아들을 정도입니다. 대졸 신입사원 뽑으면서 전공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저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중학교 때부터 연습해온 웅변을 10분간이나 계속했다. 회장단은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어차피 삼성에 갈 생각은 없었지만 속이 상하고 분통이 터졌다. 그날 저녁 막걸리를 잔뜩 마시고 곯아떨어졌다.
◆현장을 알아야 경영을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고 기업인데, 삼성이 얼마나 좋노! 니가 행정고시에 합격한다는 보장이 있나? 삼성에 취직하지 않으면 앞으로 용돈은 한 푼도 없다."
삼성그룹 합격 소식이 전해지자, 가족과 친척들이 난리가 났다. 온갖 회유(?)와 협박(?)이 잇따랐다. 현실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가난에서 벗어나자'던 어릴 적 소망은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청소년 시기와 대학시절의 치열함은 직장생활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은 모두 김 부회장의 몫이었다. 그렇게 입사 15년 만인 1988년 관리담당 임원이 되었다.
"임원이 되어 창원 중장비공장에 가니 이미 노사분규는 진행되고 있었고 적자도 많았습니다.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현장을 돌아다니며 인터뷰를 해본 결과, 조직이 경직되고 현장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습니다. 현장 사람들이 임원 보기를 하늘나라 사람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원들한테 노사분규 잘했다고 했습니다."
김 부회장은 1년 내내 현장에서 직원들과 함께했다. 토'일요일에도 직원들 틈에 끼여 술 마시고 대화를 이어갔다. 현장직원들이 아프거나 길흉사가 생기면 빠지지 않고 찾아갔다. 그렇게 직원들의 마음이 열리면서 1년 뒤에는 적자 회사가 흑자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그룹경영대상을 받았다.
"현장을 모르는 최고경영자는 성공한 CEO가 될 수 없습니다. 서류보고로 만족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간부들은 규정에 얽매이기 쉽습니다. 원래 규정은 일을 잘하기 위한 것이니만큼,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규정은 항상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을 경영자가 현장에서 단번에 해결해주어야 일할 맛 나는 사업장이 될 수 있습니다."
상무 시절 일이다. 현장직원이 시커먼 면장갑을 끼고 일하는 모습을 보았다. 공구와 부품을 만질 때마다 이물질이 묻어 다시 세척을 하고 도장을 하는 등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기가 막혔다. 현장직원은 20켤레가 필요한데, 규정상 총무'자재'현장직원 할 것 없이 한 달에 5켤레의 면장갑을 지급받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현장직원의 월급이 뻔한데 회사에서 당연히 사주어야 할 비품을 자기 돈으로 사서 썼으니 그동안 속으로 회사 욕을 얼마나 했겠습니까? 현장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김 부회장은 임원 시절 총무부장을 데리고 다니며 복리후생 문제를 그 자리에서 해결해 주었다. 한여름 조선소 현장 노동자를 위해 직접 트랙터를 몰고 얼음을 퍼다주고, 점심 후 얼린 생수병을 제공하는 아이디어도 노동자들의 고된 현장을 직접 보고 경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계 1등, 꿈은 이루어진다
2001년 3월 삼성중공업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한 김 부회장에게 그해 연말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는 그야말로 가시방석이었다. 이건희 회장의 지적은 따끔하다 못해 끔찍했다. 수십 년 동안 이익 한 번 못 내고 노사분규는 상습적으로 일으키는 대표적 문제 사업장으로 삼성중공업이 찍힌 것이다.
"쫓겨나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라! 그래, 쫓겨날 때 쫓겨나더라도 일이나 한번 실컷 해보고 쫓겨나자'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모든 측면에서 현대중공업의 5분의 1, 대우조선해양의 3분의 1에 불과한 삼성중공업이 살아남을 길은 솔직히 암담했다. 전 직원이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다. 2001년 12월, 1박 2일의 전 사원 워크숍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여러분은 계속 안 된다는 소리만 했다. 내 계획대로만 하면 5년 내 세계 1등이 될 수 있다. 내 뜻을 따르지 않겠다는 사람은 내일 당장 장기휴가(퇴사)를 떠나라."
다음 날 모두가 출근했다. 김 부회장은 한마디 했다. "그래, 그럼 이제 시작하자."
그리고 솔직히 말했다. "5년 뒤 세계 1등을 해야겠는데, 내게 아이디어가 없다. 1만5천여 명 전 직원 누구라도 아이디어를 내면 건당 1만원을 주고, 만일 아이디어가 채택되어 이익을 낼 경우 10%를 인센티브로 주겠다."
'배는 왜 육지에서만 만드나, 바다에서 만들면 안 되나?' 등 톡톡 튀는 아이디어들이 쏟아졌다. 제안은 2만 건이 넘었다. 발상의 전환을 넘어 도약이 이루어졌다. 바다에서 배를 만드는 플로팅 도크(Floating Dock)와 메가블록공법이 세계 최초로 도입되었다. 3천t짜리 대형 크레인을 활용해 10여 개의 블록으로 바다 위에서 선박 한 척을 뚝딱 만드는 획기적 발상이 현실이 되었다. 통상 150여 개의 소형 블록을 육지에서 조립하는 기존의 방법에 비해 건조기간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북극해 항해를 위해 쇄빙선과 유조선을 하나로 결합한 쇄빙유조선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극지용 드릴십, 세계 최대 LPG선, 세계 최초 LPG-FPSO선(가스전을 시추하고 채굴한 가스를 저장했다가 스스로 하역할 수 있는 1인 3역의 다용도선. 한 척 제작비가 50억달러에 달한다) 등 고부가가치 선박이 삼성중공업의 주된 수익원이 되었다.
이렇게 대표이사 사장 및 부회장을 거치면서 삼성중공업은 ▷선박 건조능력(30척→70척) ▷매출(4조원→17조원) ▷이익(500억원→1조원대)의 실적을 거두며 세계 1위의 조선업체가 되었다.
김 부회장은 "돌이켜 보니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꿈을 크게 꾸느냐 작게 꾸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것 같다. 꿈이 있으면 노력하게 된다"며 "모든 것은 변한다. 인생도 (흙수저 출신이기 때문에 평생 흙수저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유연하게 생각하라"고 청소년들에게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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