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이모(60) 씨는 요즘 들어 무엇이든 잊어버리는 일이 잦았다. 조금 전까지 썼던 휴대전화를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리고, 손에 지갑을 들고 지갑을 찾는 황당한 경험도 했다. 자주 통화하는 친한 친구의 이름이 도통 생각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에는 웃어넘겼던 이 씨는 점점 깜박하는 강도가 심해지자 '혹시 치매가 아닐까' 하는 불안에 휩싸였다. 잔뜩 긴장해 병원을 찾은 이 씨는 "치매가 아니라 우울증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받고 '웃픈'(웃기지만 슬픈) 기분에 휩싸였다.
고령층에게 치매는 암보다도 두려운 존재다. 소리없이 찾아와 천천히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진다는 인식 탓이다. 사실 치매는 특정 질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어떤 원인으로 정상이던 지능이 떨어지면서 일상생활이 어려워진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치매 상태'를 일으킬 수 있는 질환은 매우 다양하다. 전체 치매환자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알츠하이머 치매 외에도 뇌혈관질환이 원인인 혈관성 치매, 루이소체 치매, 파킨슨병에 따른 치매, 전두측두엽 치매 등도 있다. 또한 우울증이나 섬망 등 치매와 증상이 비슷하지만 치매가 아닌 질환도 있다.
#우울증
◆우울증 걸려도 기억력 떨어지고 생각 속도 느려져
우울증에 걸리면 우울한 기분 외에도 집중력과 기억력이 떨어지고 생각의 속도가 느려지는 등 다양한 인지증상이 나타난다. 실제로 60세 이전에 치매가 나타날 확률은 굉장히 낮다. 우울증에 걸리면 쉽게 정신이 멍해지고, 방금 무슨 일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리거나 엉뚱한 실수를 자주 저지르게 된다. 또한 불안과 걱정이 심해지면서 사소한 실수를 해도 두려움에 휩싸이고, 치매에 걸린 것은 아닌지 염려해 병원을 찾게 된다.
우울증은 치매와 달리 기억력 저하가 일관되지 않는 게 특징이다. 본인에게 중요한 일이거나 관심을 갖고 있는 일은 잘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기억력이 떨어지더라도 우울증을 치료하면 기분이 나아지고 기억력도 회복된다.
우울증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수개월 또는 수년간 지속되며 삶의 질을 심각하게 떨어뜨린다.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초래할 수도 있다. 우울증의 치료는 정신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한다. 우울증상은 한두 달가량 지속적으로 항우울제를 복용하면 많이 좋아진다. 증상이 나타나면 6개월이나 1년 정도 유지 치료를 하며, 약물은 재발 우려가 없을 때까지 충분한 기간 동안 복용하는 것이 좋다. 김병수 칠곡경북대병원 정신건강센터 교수는 "흔히 정신과 약물은 중독성이 있어서 약을 끊지 못할까 봐 걱정하지만 항우울제는 장기간 투여해도 의존성이 생기지 않는다"고 조언했다.
#섬망
◆갑자기 헛소리한다면 섬망 의심
섬망은 갑작스럽게 집중력이나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증상을 말한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방금 들은 내용을 잊어버리거나 횡설수설하는 게 특징이다.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거나 시간과 장소를 헷갈려하고,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기도 한다. 우울감, 무력감, 불면증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섬망은 주로 수술을 받았거나 중환자실에 입원 중인 노인 환자들이 자주 겪는다. 이 때문에 충동적으로 주삿바늘이나 배액관을 뽑거나 갑자기 침대에서 내려오다 다치는 경우도 있다.
섬망과 치매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전혀 다른 질환이다. 치매는 대개 수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는 반면, 섬망은 몇 시간에서 며칠 사이에 갑자기 나타난다. 또 치매 초기에는 의식이 맑고, 하루 중 증상의 변화가 두드러지지 않지만, 섬망은 의식이 흐릴 때가 많고 하루 중에도 정신이 맑았다가 흐려지는 상황이 반복된다. 섬망은 치매와 달리 원인이 해결되면 인지기능이 예전처럼 회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섬망을 일으키는 원인은 다양하다. 폐렴을 비롯한 전신 감염이나 골절, 심장질환, 저산소증, 전신마취, 수술 등이 대표적이다. 향정신성의약품이나 마약성 진통제 등 집중력 장애를 일으키는 약물도 원인이 될 수 있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거나 뇌질환을 갖고 있는 경우 감기약이나 수면제만으로도 섬망을 겪을 수 있다. 섬망은 원인을 찾아내 교정하고 환자의 증상을 안정시키는 게 중요하다. 원인만 적절히 치료하면 1~2주에 걸쳐 서서히 호전된다.
#뇌'대사성 질환
◆뇌 또는 대사성 질환 치매는 치료 가능해
치매를 일으키는 원인 질환은 50가지가 넘는다. 알츠하이머 치매가 아니라면 원인과 치료 시점에 따라 회복이 가능한 치매도 적지 않다. 일부 뇌 관련 질환이 대표적이다. 뇌종양이나 뇌를 감싸는 막에 피가 고이는 경막하출혈, 뇌실에 물이 차는 뇌수종, 뇌로 가는 혈관이 막히거나 터지는 뇌졸중은 치매 증상을 일으킨다. 뇌질환으로 뇌가 압박을 받거나 산소와 영양분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서다. 뇌질환에 따른 치매는 알츠하이머 치매와 달리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거나 종종걸음을 걷는 등 행동 변화를 동시에 겪는 경우가 많다.
대사성 질환으로 인한 치매도 회복이 가능하다. 갑상샘 기능 저하나 간'신장의 기능 이상 등이 주된 원인이다. 우리 몸의 노폐물을 처리하는 간이나 신장에 이상이 생기면 독성물질이 혈액을 타고 뇌로 들어가 치매 증상을 일으킬 수 있다. 갑상샘 호르몬 분비가 줄어도 뇌 활동이 약해지고 만성피로와 식욕부진, 부종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비타민 섭취도 중요하다. 비타민 B1과 비타민 B12, 엽산 등이 부족하면 기억력이 크게 떨어진다. 특히 알코올 중독자는 알코올 대사 과정에서 비타민 B가 소모돼 뇌가 손상을 입는다.
김병수 교수는 "경험에 비춰볼 때 치매 증상을 일으키는 가장 흔한 원인은 약물과 알코올 남용"이라며 "이 두 가지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고, 다른 치매도 일찍 발견할수록 회복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고 조언했다.
도움말 김병수 칠곡경북대병원 정신건강센터 교수(대구광역치매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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