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대구법원 100년 자료 전시회

오늘은 제3회 '대한민국 법원의 날'입니다.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난 후 1948년 9월 13일 가인 김병로 선생이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하면서 대한민국의 사법권은 진정한 독립을 맞았고, 대한민국 법원에서는 2015년부터 9월 13일을 '대한민국 법원의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법권이 독립되기 전, 일제강점기하의 법과 재판은 어떠하였을까요? 1895년 대한제국은 재판소구성법을 공포하며 근대 사법제도를 도입했지만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체결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사법권을 완전히 빼앗습니다.

우리 땅에서 일본인 판검사들이 일본말로 재판하였고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하는 조약'이 공포되면서 행정'입법'사법을 모두 관할하는 조선총독부가 설치됩니다.

그 무렵 대구는 상업과 교육의 중심지이자 부산과 서울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조선의 3대 도시로 꼽혔습니다. 일본은 대구를 식민통치의 지방 거점으로 삼았고, 경성'평양과 함께 이곳 대구에 2심 재판을 담당하는 공소원을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1908년 중구 공평동에 자리 잡은 '대구공소원'은 1912년 '대구복심법원'으로 개칭되고, 일제강점기 동안 경상북도 지역은 물론 경상남도, 전라도 지역까지 관할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일본제국 헌법과 일제 법령을 의용한 조선민사령, 조선형사령 등이 적용되었고, 1940년 2월부터는 우리의 성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는 창씨개명제도도 시행되었습니다.

길고 어두운 비극의 시절이 지나고 민족의 염원인 해방을 맞아, 대한민국은 비로소 사법 주권을 회복하였습니다. '대구복심법원'은 새 시대를 맞아 '대구고등법원'으로 개칭되었고 1973년 수성구 범어동 현재 위치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 후로 40여 년이 흘러 지금의 대구법원종합청사는 대한민국 법원 중 가장 역사가 깊은 건물이 되었고, 이제는 2024년을 목표로 청사 이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구고등법원과 대구지방법원에서는 이번 법원의 날을 기념하고 대구법원 100년사를 되돌아보면서, 11일부터 22일까지 대구법원종합청사 대강당에서 '일제강점기 법과 재판'을 주제로 하는 '법원사 자료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1910년 일제가 우리 주권을 강탈한 조약인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하는 조약', 1919년 최남선이 배포한 '3'1 독립선언서', 1940년 창씨개명정책에 따라 제출해야 했던 '씨설정계', 일제강점기 감시 대상 인사카드 등의 실물이 전시되고, 1912년 공평동의 '대구복심법원', 1973년 범어동의 '대구고등법원'을 담은 사진도 함께 전시되어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의 대구법원 100년사를 되짚어보게 됩니다.

2024년의 대구법원 청사 이전은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재판, 더 나은 사법 서비스를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대구법원은 이런 출발점에 서서, 현재의 법치주의와 사법권의 독립이 그저 주어지는 당연한 명제가 아님을, 굴곡과 인고의 역사 속에 깊이 심겨진 소중한 유산임을 다시금 새겨보고자 합니다. "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언자는 과거이다"라는 시인 바이런의 명언처럼, 대구법원의 100년 역사 속에 비쳐지는 내일을 조심스레 점쳐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여러분을 '법원사 자료 전시회'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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