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 칼럼] 다리 몽댕이를 분질러?

두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는 가끔 매를 들었다. 고만할 때는 이런 '공포를 앞세운 위협'의 효과를 좀 봤다. 부모가 화를 내고 회초리를 드는 것이 무서워 행동을 교정하기도 하니까. 그래서 산에서 주워온 나뭇가지로 회초리 하나를 '멋지게' 다듬어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이 어느 정도 철이 들고 나서는 매를 들 일이 없었다. 그럴 일이 없었던 것인지 스스로 매를 들지 않으려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이후로는 아이들을 때린 기억이 없다.

커가면서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말썽을 피운다고, 잘못을 했다고 점점 더 큰 회초리, 더 굵은 매로 벌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예전 어른들의 말씀대로 정말 '다리 몽댕이를 분질러' 놓아서야 되겠는가. 어쨌든 내 새끼인 것을.

요즘 시중에서는 아이들의 다리 몽댕이를 분질러 놓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한참 높아지고 있는 모양이다. 지난 1일 부산에서 벌어진 '피투성이 여중생' 사건 때문이다. 여러 명의 10대 소녀들이 또래의 한 여중생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사건이었다. 가해자들이 10대 초반의 여중생이라는 데서 충격은 더 컸다. 귀엽고 어린, 아직은 그저 '아이들'일 거라 생각했던 여학생들의 그 어디에 그런 잔혹함이 내재해 있었던 것일까. 어른들도 차마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폭력성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부산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뒤 전국 곳곳에서 비슷한 보도가 잇따랐다. 강릉에서도 10대 여고생들이 동급생을 무차별 폭행했다. 아산에서도, 서울에서도, 인천에서도, 부천에서도….

이 지경이니 어른들의 입에서 그런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폭력 청소년들에게 더 무서운 처벌을 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서 더 강력한 처벌을 내리는 데 걸림돌이 되는 소년법을 폐지하자고도 한다.

강력한 처벌을 통해 범죄 발생을 억제한다는 개념은 앞서 언급한 '공포를 앞세운 위협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더 강한 처벌을 내림으로써 비슷한 범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다른 아이들에게 경고를 주겠다는 뜻이다. '잘 봤지? 너희들도 잘못을 저지르면 이렇게 무서운 처벌을 받게 될 거야. 조심해'라고.

정말 그렇게 될까? 다른 사람의 처벌을 본 청소년들이 위협을 느끼고 범죄를 포기할까? 소년범들에게 있어서는 이런 위협 효과가 별로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처벌 강화와 범죄 예방 사이에 비례관계를 보여주는 어떠한 통계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낙인 효과'를 불러 자포자기하게 하고 재범의 늪에 빠지게 할 우려도 있다. 사소한 절도로 소년원에 다녀온 후 범죄자로 낙인 찍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흉악범의 굴레를 쓴 유영철과 같은 경우다. 처벌 강화에만 방점을 둔 소년법 폐지나 개정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이 낮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도 '교화'와 '치료'가 우선이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아이이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그 심각성을 잘 모르는 것이 청소년이다. 자아가 미성숙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바로잡아 주느냐에 따라 달라질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소년법이라는 특례 제도도 그래서 만들어 둔 것이다. 교화와 치료가 처벌보다 앞서야 하는 이유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에게는 그 아이 자신보다 주위의 환경에 문제가 있을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이다. 온갖 유해 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된 아이들, 성적만을 최고의 선(善)이라 생각하는 어른들, 경쟁에 뒤처지면 패배자가 되어버리는 풍토, 이런 것들이 우리 아이들을 '괴물'로 만드는 것들이다. 장기적으로는 이런 문제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강력한 처벌을 논하기에 앞서 함께 고민하자.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이 비뚤어지지 않게 할 것인지, 비뚤어진 아이들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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