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칼럼] 친박의 운명

친박이 찬밥 신세다.

1년 전만 해도 집권 여당 새누리당의 압도적 주류였던 친박이다. 아침 TV드라마급 '막장 공천'으로 총선 전 180석 전망이 122석으로 결과가 쪼그라들었어도 새누리당의 운전석은 친박들 차지였다. 총선 4개월 뒤인 8월 전당대회에서도 쏟아지는 총선 패배 책임론을 보란 듯이 걷어차고 당권을 지킨 친박이었다. 이후 불어닥친 탄핵과 대선 국면에서 다소 위축되고 파편들이 일부 떨어져 나갔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철저하게 무너져내릴 줄은 몰랐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14일 연세대 특강에서 "친박은 국회의원 한 번 하기 위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치맛자락을 잡은 집단"이라고까지 격하했다. 금배지만 따려고 모인 이익집단으로, 도매금으로 평가절하당한 것이다. 이익집단이란 이해득실을 제일로 삼아 볼일을 다 보면 '빠이빠이' 하는 관계다. 편의상 친박계라고 불러서 그렇지 정치결사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말이다.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쓰다 달다 말이 없다. 원내는 물론 원외까지 합하면 줄잡아 100명은 넘고 많이 보면 150명 정도 되는 위원장들이 친박이었을 텐데 다들 꿀 먹은 벙어리다. 홍 대표가 "친박은 이념으로 뭉쳐진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한 번 더 대못을 박아도 조용하기만 했다.

본래 친박은 YS의 상도동계나 DJ의 동교동계처럼 형제애나 동지애로 똘똘 뭉친 집단이 아니었다. 상도동이나 동교동에는 조폭집단의 '룰' 비슷한 게 있었다. 짬밥에 따른 위계질서도 있었고 역할도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친박에는 그런 게 없었다. 또 두 동네에는 보스가 위기에 몰리면 대신해서 터지고 깨지고 바가지를 쓰겠다는 '대타'들이 줄을 섰다. 가신들이라는 전근대적 집단들도 포진해 있었다. 보스를 위해 '대리 복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친박은 안 그랬다. 이익집단이었으니 집단의식이나 희생정신도 없었다. 지금 와서 보면 내부의 룰도 없이 '각자도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전후 사정을 빠삭하게 알고 있는 홍 대표다. 그가 '박 전 대통령 치맛자락'을 잡으려고 줄을 서던 사람들이 박근혜 지우기에 반기를 들지 못하고 또 안 할 것이라는 걸 몰랐을 리 없다. 박근혜 지우기에 한국당이 요동을 칠 것이라는 정치권 일각의 전망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홍 대표의 계산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친박이라는 사람들은 박 전 대통령을 둘러싼 위성 같은 존재들이었으니 태양이 사라진 마당에 힘도 잃고 또 길도 잃고 뿔뿔이 흩어지는 게 어찌보면 당연하다. 이미 상당수 친박들은 친박 완장을 벗어 던지고 말을 갈아탔으니.

필름을 다시 되돌려봐도 탄핵과 대통령의 구속 국면에서 잘나가던 친박 누구 하나 머리 풀고 멍석 깔고 대성통곡이라도 하는 이가 없었던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오매불망 떠받들던 박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금배지가 뭐 그리 중하다고. 확 떼어내고 일갈이라도 했어야 했다, 삼성동을 지키든지 낙향이라도 하든지. 하긴 그런 인물이 있었다면 친박이 오늘같이 되지도 않았겠지. 그렇게 많던 '박근혜 호위무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친박이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한 번 더 남아 있기는 하다. 다음 달로 예정된 박 전 대통령 1심 선고다. 당 혁신위 권고에도 홍 대표가 박근혜 지우기 타이밍을 그때 이후로 늦춰 잡은 건 충격파를 줄이려는 예방주사 효과 때문이다. 유죄가 나온다면 명분도 홍 대표 쪽이다. 힘도 홍 대표에게 있다. 무게중심이 홍 대표 쪽으로 확 쏠리는 형국이다. 패키지로 몇몇 인사들까지 나가라는 최후통첩도 해 놓았다.

친박들의 집단 반발 가능성을 점치는 이도 있지만 별일 없을 거라는 이가 더 많다. 상대가 친박이라서 홍준표의 승부수가 성공할 것이라는 거다.

10년 가까이 귀에 익었던 '친박'이라는 두 글자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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