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정거장에는 경계 병력들이 상주했고 범죄자 임시 유치 시설을 두고 있었다. 헌병과 보조원이 나간 후로 계승은 지하실에 혼자 남았다. 두어 평 되는 공간은 사방이 막혀 있고 어두웠고, 곰팡이 냄새가 들이쳤다. 포승줄에 팔과 가슴이 묶인 계승은 구석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미미한 진동이 천장에서 쿵쿵 울렸다. 어젯밤에 황제를 만나고 온 몸이 아닌가. 나라와 백성을 한 손에 쥔 황제의 용안을 바라본 눈과 그의 앞에 엎드렸던 이마와 그의 말을 담았던 귀가 이 궁벽한 정거장 유치소에 갇혀 있는 것이다. 말할 수 없이 무참했다. 오히려 등짝에 감춘 폐하의 칙유가 저놈들 손에 넘어가면 그것이 폐하의 위대함을 가리키긴커녕 수모를 안기게 할 것이다.
보조원이 나간 후로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포승줄이 느슨해지도록 몸을 비틀어보았다. 다부지게 묶여 있어 팔을 움직일 여지가 없었다. 밖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열쇠로 문을 따고 헌병들이 들어왔다.
금릉은 걸레로 방을 꼼꼼히 닦는다. 성당 앞 개울에서 길러 왔던 물에 걸레를 빤다. 몸을 옮기며 문설주, 문틀, 봉창에 일일이 손을 댄다. 물걸레질로 손바닥이 빨갛다. 계승이 세를 얻은 계산성당 건너편 마을에 위치한 집이다. 집은 아직도 곳곳에 소재할 게 많다. 도장방 구석에 쳐진 거미줄, 죽은 벌레가 썩어서 곰팡이로 부풀어 있는 부뚜막, 봉창에 끼여 죽은 곤충들.
아침에는 기루에서 글씨를 쓰다 버린 당지와 지난 신문을 챙겨 왔다. 걸레를 놓고 종이에 풀칠을 한다. 도배를 마치면 뽀얀 새집이 될 것이다. 그런 상상이 금릉에게 힘을 솟게 한다. 겉옷을 벗고 엎드려서, 가늘고 흰 팔을 휘저으며 종이에 풀을 묻힌다. 며칠 전의 영상이 금릉의 머릿속에 넘실거린다. 도톰한 입술, 넓은 그의 가슴. 원숭이처럼 털이 북슬북슬한 허벅지가 그녀의 뺨에 대였지. 그 촉감이 어떻더라. 너무 커지 않아요? 그녀는 그의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성기 같다고 생각했던 것을 지금 그녀는 떠올린다. 어찌나 튼튼했던지. 그가 여기 누워 있었어. 사랑을 끝내고 조금 지친 듯이 팔을 벌리고 누워 아름다운 눈으로 그녀를 마주보았지. 그녀는 다시 손바닥에 풀을 흠뻑 묻혀 종이에 문지른다. 손바닥에 담기는 부드러운 감각 때문에 그날 누워 있는 그의 가슴을 어루만질 때의 촉각이 섬세하게 되살아난다.
풀을 묻힌 종이를 벽에 척척 걸친다. 손바닥과 마른 걸레로 꼭꼭 여미듯 벽에 종이를 접착시킨다. 뒤꿈치를 한껏 세워 키를 높인 뒤 천장까지 이르도록 벽지를 바른다. 벽지를 붙이다가 한순간 그녀는 망연해진다. 벽을 껴안고 숨을 죽인다. 풀이 종이 위로 배어나와 그녀의 뺨이 젖는다. 그가 오지 않는다면 혼자 여기서 살 수 있을까. 만약에 그가 오지 않는다면 이 집이 왜 필요할까. 그녀는 벽을 부둥켜안는다.
장상만이 농루로 찾아온 것은 그저께 저녁이었다. 성벽 철거 부역을 마치고 돌아와 몸을 씻고 났을 때였다. 그녀는 장상만을 따라 달서교 옆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장상만의 얘기는, 추풍령에서 잠을 깼는데 계승이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일등석에서 삼등석까지 다 뒤져봤다고 했다. 그녀는 아연했다. 장상만은 어릴 때부터 알았던 동네 오빠였다.
"황간에 내려서 밤새도록 걸어 대전까지 올라갔어. 연변에 다른 기미라곤 없었어. 기차를 공격하다가 사살된 시체들이 더러더러 있었지만 시일이 꽤 지난 것이었고...... 다음날 아침에 대전 정거장에 도착했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일본 헌병에게 누가 여기서 체포가 되었냐고 물을 수는 없잖아."
금릉은 장상만에게 화를 내지 못했다. 핏발 선 눈과 초췌한 모습이 그녀의 항변을 막았다. 장상만과 헤어지고 그녀는 세를 얻은 집으로 가보았다. 풀을 뽑고 흙은 돋운 마당에 저녁 어스름이 져 있었다. 계승이 기울어진 처마를 세운 게 며칠 전이 아닌가. 비틀어진 문짝을 뜯어내고 새 문짝을 끼운 안방에서 그가 문을 활짝 열며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사뭇 떠난다고 했던 홍란이 어느 날 기루 문을 두드리면서 "언니 저 왔어요." 배시시 웃던 일. 철도 연변의 어떤 사건으로 죽은 줄 알았던 이모부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돌아와 담배 밭에 일을 나가지 않는가.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어릴 때 동무들 가운데 몇은 소식도 없이 종적을 감추었고 유학자인 성주(星州)의 외할아버지는 생사를 알 수 없을 뿐더러 집마저 잿더미가 되었다. 계승도 7년 만에 홀연히 출현했다가 갑자기 증발해버리는 건가.
날이 어두워서 세를 얻은 집을 나선다. 서툰 도배질을 하느라 머리와 팔과 어께에 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성당 뒤, 제일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사람들이 몰려나온다. 성당 종탑 옆에 있어야 할 서장대가 별안간 눈에 띄지 않는다. 남문과 서문 사이, 성곽 위에 높이 솟은 주승루(서장대)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늘 높이 뻗은 종탑의 허리쯤에 걸쳐져 있던 합각지붕의 풍경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 마치 계승이 불현듯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금릉은 생각한다.
바로 어제 서장대를 헐었다. 지난 해 무너뜨린 북쪽 성곽을 빼고 나머지 성곽을 철거하기 시작한 것은 나흘 전부터였다. 성 안팎의 주거민들에게 부역령이 떨어졌다. 동문 쪽에 사는 사람은 동쪽 성벽을, 남문 쪽에 사는 사람은 남쪽 성벽을 헐었다. 인구가 많은 서문 밖 사람들은 동쪽 성벽 철거에 동원되었다.
금릉도 서문 옆, 성곽 아래에서 쏟아진 흙을 나르는 짓을 했다. 지난 해 성 철거를 두고 온갖 사건이 꼬리를 물지 않았던가. 사람이 죽고, 대구 사람을 쓰지 못해 부산에서 인부를 구해왔다. 한쪽 성곽이 허물어지자 원형으로 서로를 지지하던 성곽의 균형이 틀어져 곳곳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위태로운 것은 사실이었다. 누구나 성 철거를 반대했지만 금이 생기자 상황이 변했던가. 그러나 아무도 철거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부역령이 내려졌다. 전체 부민 동원령이 내려진 게 30년 만이라고 한다. 군수 박중양이 내린 부역령은 확고했다. 갈팡질팡하던 부민들의 마음을 관통하면서, 지난 가을 숨어서 성을 허물던 유약함을 만회하겠다는 듯이, 북후정 연설회와 단연 연금 행렬로 한쪽에 밀려났던 도시의 행정력을 단번에 되찾겠다는 듯이, 부역령은 기습적이었고 힘이 넘쳤다.
마욱진의 지게부대가 성곽 위에 올라갔지. 수백 명은 돼 보였어. 마욱진이 그렇게 많은 일꾼들을 거느리고 있는 줄 몰랐어. 또 소와 말이 끄는 수레는 얼마였던가. 동민들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성 위에서 돌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어. 군사들과 헌병들이 감시에 나선 것은 오히려 정오부터였지. 모든 부민들이 불려나왔고, 수백 마리의 소와 말들이 늘어서서 돌과 흙을 실어나를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어. 아주머니, 저걸 다 없애면 저들이 성 안을 다 차지할 거 아니예요? 어쩌겠니......앵무 아주머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도시가 일인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우리가 도와야 하는구나. 아주머니가 머리에 수건을 쓰며 말했다. 문밖에서 진위대원들이 얼른 나오라고 재촉하는 소리를 들렸다. 성이 사라지는 것은 그녀들에게는 또 다른 일이었다. 성이 사라지면 그녀들은 기생이 아니라 창녀가 될 거야. 아무도 그런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무명 치마를 두르고 흙을 소쿠리에 담을 때에도, 돌무더기 사이에 앉아 나눠준 주먹밥을 입에 우겨넣을 때에도, 이틀 뒤, 서문과 주승루가 붉고 굵은 기둥이 꺾이면서 먼지 속으로 주저앉는 것을 눈앞에 목격할 때에도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저 흙돌로 북후정 위의 저지대를 메워서 유곽을 세우면, 우린 거기서 일해야 돼.
하루 일을 마치고 금릉은 정거장으로 간다. 기차가 마지막으로 대구로 들어오는 시각이 9시다. 금릉은 허름한 정거장 안에서 지인을 마중 나온 부민들에 섞여 계승을 기다린다. 나무로 된 기둥마다 석유램프가 켜져 있다. 하루 종일 노역에 시달린 부민들이 바닥에 앉거나 서 있다. 금릉은 이제 곧 계승이 나타나기라도 할 듯이 승강장 출입구를 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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