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백제를 만나다

남의 나이 되기 이태 전 겨울, 우리는 백제를 만나러 갔다.

'고요히 혀 깨물어도/ 피 흘리는 손톱으로 흙을 쥐어뜯어도/ 벌판의 자궁(子宮)에서 태어난 목숨/ 그 어머니인 두 팔이 감싸 주네.'(이성부, '백제행'(百濟行) 2연)

웅진(熊津) 계룡산 들머리의, 동화사 아닌 동학사. 그곳에서 청량사지 가는 돌층계를 밟으며 나는 갓바위 길을 떠올렸다. 아니나 다르랴, 팔공산 꼭대기의 돌부처와 계룡산 봉우리의 두 돌탑. 좁쌀술을 사들고 '단풍잎만 차곡차곡 떨어져 쌓인' 산장에 들었다. 이튿날 갓밝이가 되자마자 '구름에 달 가듯' 또다시 '서(西)로' 향했다. 팔도를 무른 메주 밟듯 한 J선생은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핸들을 잡은 P선생은 최진희의 '여심'(女心)을 빨랫줄 낭창거리듯 불러 젖혔으며, 하릴없이 나는 백제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사비(泗沘)는 길의 끝머리에 있었다. 궁남지를 거쳐 백마강 둑에 섰다. 아니, 금강 혹은 사비강은 있을지언정 백마강이란 없다. 역사는 승자를 기록하지만, 나는 패자를 기억한다. 신라 장수도 아닌 되놈 소정방(蘇定方)의 전설을 따 이름 짓다니. 하긴 내가 사는 동네 언저리에도 이런 같잖은 지명이 많다. 무슨 자랑이라고, 공산 싸움에서 패한 왕건의 도주 경로를 따라 파군(罷軍'군사를 풀어 헤침)재, 해안(解顏'멀리 도망쳐 얼굴 근육이 풀림), 안심(安心'더 멀어져 마음 놓임)이라니. 청소하는 아줌마들과 일본인 관광객 서넛이 눈에 띄었을 뿐, 부소산 오르는 길은 고즈넉했다. 드디어 낙화암에 서서 발아래 사비수를 굽어보니 아뜩했다. 눈을 감았다.

'온 메가 검은 연기로 뒤덮인다. 뱀의 혓바닥같이 널름거리는 불길이 허공으로 치솟는다. 고라니가, 나뭇짐을 벗어 던진 남정네가, 물동이 내던지고 똬리를 배턴인 양 움켜쥔 아낙이 한 방향으로 뛴다. 천 길 낭떠러지다. 그들은 불의 혀를 피해 물의 가슴으로 뛰어든다. 셋, 서른, 삼백, 삼천…내 육신도 슬로 모션으로 하강한다.'

푸르르 떨며 나는 눈을 떴다. 백제인이여, 부끄러워 말지어다. 그대들에게는 충신 성충(成忠) 흥수(興首)가 있었고, 일당백의 장수 계백이 있지 않았는가. 외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토호 출신에게 나라를 고스란히 바친 왕을 둔 신라인인 것을. 만감이 교차하는 어수선한 맘을 다스리는 데는 고란사 샘물이 안성맞춤이었다. 영종각(靈鐘閣) 옆으로 돌아 나올 때 바람 한 점 일면서, 이번에는 처마에 묶인 물고기가 코밑의 물로 뛰어들고자 안달을 했다. 댕그랑 댕그랑.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길손의 마음은 솔개 어물전 돌듯 낙화암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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