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출고된 번쩍이는 신차도 20년쯤 타면 엔진에서 경운기 비슷한 소음이 나고 도장도 군데군데 벗겨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래된 자동차라도 철저하게 관리한다면 오히려 새 차에선 느낄 수 없는 독특한 향취가 나기도 한다. '고물 차'와 '클래식 카'의 차이는 여기에서 나온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구도심인 중구는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오래된 고물 차였다. 여기에 중구청은 과감하게 '근대문화골목'이라는 고출력 신형 엔진을 얹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문화예술과 공공디자인에 초점을 맞춰 외관까지 탈바꿈하면서 멋진 '클래식 카'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노점상 빽빽하던 동성로를 '대구의 타임스퀘어'로
휴일이었던 지난 17일 오후 중구 동성로는 주말을 맞아 가을을 만끽하러 나온 시민들로 붐볐다. 대구백화점 앞 야외무대에서는 한 청소년 댄스팀의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연신 흥겨운 듯 어깨를 들썩였다. 대도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단일 도심 구조를 유지하는 대구의 심장부임이 여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동성로는 '대구의 심장'이라 하기엔 초라했다. 낡은 간판과 건물들에다 불법 노점상들이 도로 한가운데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구청이 '동성로 공공디자인 개선사업'을 입안하며 가장 먼저 노점상 정비 문제를 들고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새로운 동성로'와 노점상의 공존은 불가능했고, 중구청은 행정대집행까지 실시한 끝에 합의에 도달했다. 대구 공공디자인 사업의 근간이 된 '동성로 공공디자인 개선사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어 중구청은 전신주 지중화와 함께 간판'가로를 근대풍으로 정비하고, 읍성길을 따라서는 옛 읍성터 상징물을 설치하는 등 대구읍성의 토대를 시민들에게 드러내고자 했다. 전문가들은 바로 이 '대구읍성과의 연계'를 동성로 공공디자인 개선사업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이자 성공 요인으로 꼽는다. 동성로(東城路)라는 이름부터가 '대구읍성의 동쪽 성곽로'라는 의미인 만큼 역사'문화적 정체성을 살린 디자인을 통해 거리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100년이 넘는 시간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영남의 중심, 대구읍성은 이렇게 화려한 부활을 맞이했다.
전문가들은 이 사업으로 비로소 동성로가 확고부동한 대구의 심장부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한다. 깨끗하고 쾌적하게 정비된 거리에는 하루 100만 명에 달하는 유동인구가 몰렸다. '오픈 스페이스' 형태로 재구성된 대구백화점 앞 광장에서는 매일 온갖 종류의 공연이 열려 시민들의 눈을 즐겁게 해줬다. 마치 미국 뉴욕시의 상징 '타임스퀘어'처럼 대구의 상징이자 얼굴이 된 것이다.
◆문화예술로 '관광도시 중구' 견인한 김광석길
18일 오후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 김광석길.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김광석의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지역 문화예술인 각자의 개성이 뚜렷하게 묻어 있는 벽화와 더불어 골목 전체에 색다른 분위기를 씌워주고 있었다.
방천시장은 과거 서문시장, 칠성시장과 함께 대구 3대 시장 중 하나로 꼽히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도심공동화 현상과 주변에 속속 들어선 대형마트'백화점에 밀려 쇠락했다. 한때 1천여 개에 달하던 점포도 60여 개로 쪼그라들었다.
사라지는 듯했던 시장에 활기가 돌아온 건 지난 2009년 무렵이다. 대구시와 중구청이 지역 예술인'시민들과 힘을 모아 전통시장에 문화예술을 접목하는 '방천시장 별의별 별시장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다. 이어진 '방천시장 문전성시 사업'에서는 지역 예술인들의 아이디어로 골목길에 가객(歌客) 김광석을 접목, 벽화와 조형물 등이 등장하면서 오늘날 대구 전체의 랜드마크가 된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의 토대를 쌓았다.
전문가들은 방천시장을 전통시장과 문화예술이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사례라고 평가한다. 수도권에 밀려 소외됐던 지역 문화예술인들은 솜씨를 마음껏 뽐낼 공간을 얻었고, 이들로 인해 유동인구가 늘자 자연스레 상가 매출도 늘었다. 이에 상인들은 자발적으로 예술인들의 스폰서가 되는 선순환 구조가 완성됐다.
◆젠트리피케이션 문제 해결은 숙제
중구의 연쇄적인 문화예술'공공디자인 기반 도시재생 사업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부작용도 낳았다. 골목길이 아름답게 재구성되면서 도시 전체의 가치가 높아져 버린 탓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 환경 변화로 중'상류층이 도심 낙후된 지역으로 유입, 지가나 임차료 등이 점차 상승하면서 비싼 월세를 감당할 수 없는 원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밀려나는 현상을 말한다.
처음 김광석길을 만들었던 지역 예술가들은 김광석길이 히트하면서 2014년쯤 대부분 다른 곳으로 떠났다. 수천만원에 달하는 권리금과 수백만원대의 임차료가 치명적이었다. 인근 부동산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방천시장 상가의 권리금은 8천만원에 달하고 보증금과 월세는 각각 2천만원과 200만원대에 이른다.
이를 타개하고자 중구청은 지난해 지속가능 발전구역 지정 등의 내용이 담긴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조례' 제정을 시도했으나 중구의회의 반대로 1년째 표류 중이다. 중구청은 지난 5월 연구용역을 발주, 젠트리피케이션 발생지역에 대한 현장조사를 하고,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11월 다시 한 번 조례 제정에 나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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