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56>-엄창석

승강장 출입구로 승객들이 들어온다. 금릉은 철재로 가로막힌 출구로 바투 다가선다. 그녀의 앞과 뒤에서 반가움이 배인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무명옷과 양장을 은 사람들이 그녀 옆을 스쳐간다. 기차에서 내린 승객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내 사람들이 줄어들고 허연 불빛이 깔린 바닥이 드러난다. 그녀는 등을 보이며 정거장을 빠져나가는 아무 남자나 붙잡고 '왜 이제 왔어요?' 울음을 터트리고 싶다. 텅 빈 승강장에 서 있던 기차가 증기를 뿜으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역무원이 승강장 출입구를 닫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그녀의 가슴을 찌른다.

이튿날도 기차 시간에 맞춰 정거장으로 나와 보지만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계승은 보이지 않는다.

그 다음날 오후, 그녀는 앵무 아주머니와 같이 성 안으로 들어간다. 광문사에 가서 김광제와 서석림을 만나 무슨 말이라도 들어보고 싶은 것이다.

성은 처참했다. 4미터가 넘던 성곽은 톱으로 벤 나무 등걸처럼 낮아졌다. 허리쯤 되는 곳도 있고 아예 돌 하나 남지 않아 평지처럼 깎인 데도 있었다. 그녀가 자주 드나들었던 아름다운 누각을 뽐내던 서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폭삭 주저앉았다. 문짝이나 나무 기둥들은 성곽 자리에 쌓아놓았는데, 사람들이 장작으로 쓰겠다고 다투듯 집어 날랐다.

먼지인지 낮은 구름이 깔려선지 거리가 희뿌옇다. 성 안에 있는, 감영의 정문인 관풍루는 헐리지 않고, 독보적인 모습으로 서 있다. 그녀와 앵무는 관풍루를 보면서 걷는다. 저게 없으면 방향도 모를 뻔했어. 성 안은 그토록 낯설다. 아카시아와 라일락 향기가 잔존한 먼지 속에서 피어오른다. 둘은 관풍루 옆, 광문사로 들어간다.

회의실이나 접견실로 쓰는 인쇄실 옆방에 앵무와 금릉이 서석림과 박해령을 마주하고 앉아 있다. 두루마기에 넓은 갓을 쓴 서석림의 차림새가 변함이 없어 금릉은 왠지 안도가 된다. 보상운동이 전국을 휩쓸면서 김광제는 서울로 올라갔고 서석림도 경상도 각지를 다니며 연설회를 하느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서석림은 광문사에 들러 금방 찍은 인쇄물을 살피고 있다가 앵무와 금릉을 만난 것이다.

"임군이 지금 대구 감옥에 있다네요."

서석림이 앵무와 금릉 사이의 벽으로 눈길을 던지며 말한다. 금릉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날마다 역에 가서 기다리지 않았는가.

"시찰님.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앵무가 차분한 어조로 묻는다. 서석림이 깊은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킨다. 옆방에서 인쇄기가 철컥철컥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어젯밤에 아들놈이 집에 와서 알려준 말입니다. 임군이 3년 전에 일본 노무자 셋을 살해했다고 하네요. 청도의 철도 터널 공사장에서 말이오."

"그럴 리가 없어요!"

금릉은 자기도 모르게 소릴 지르고 만다. 흙탕물이 쏟아지듯이 온갖 것이 섞여 세상이 흘러가지만 계승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서석림이 애틋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아버님, 임계승이 1급 살인범으로 체포됐어요."

서석림은 아들 서요의 말에 자리를 고쳐 앉으며 되물었다.

"무슨 소린냐? 임군이 광문사 일로 서울에 갔다." 서요에게, 임계승이 취지문을 가지고 황제를 알현하러 갔다고는 하지 않는다.

"며칠 전, 대전 정거장에서 붙잡혀서 대구 감옥으로 압송되었습니다. 3년 전 성현터널 사태 때문이랍니다. 한인 넷이 살해에 가담했는데 모두 처형되고 계승만 혼자 남았다가 이번에 잡혔습니다."

"3년 전이라고? 내가 그걸 믿으란 소린냐?"

"저도 믿지 않습니다." 서요가 창백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한 무릎 다가왔다. "하지만 아버님, 지금 일본의 계책이 어느 때보다 치밀하고 강경한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이토 히로부미 각하마저 나라를 지키자고 돈을 모으는 한인들이 갸륵하다고 칭찬하지만 속내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기어코 허를 찔러 이 운동을 주저앉힐 겁니다. 임계승뿐 아닙니다. 동양(김광제)이 경무관을 했을 때 범법이 없었겠습니까? 아버님, 전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합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 10년 간 외획(外劃, 국가 세금을 대신 거두는 일)을 수행하시면서 엽전 한 냥 남의 돈을 취하시지 않았다고 자신하시겠습니까?"

"음......"

"여기서 그만 두십시오. 보상운동이 수그러들지 않으면 누구든 다칩니다. 지금 박제순 내각을 사퇴시킨다는 정보까지 올라옵니다. 박제순이 누굽니까? 을사년 조약때 일본편의 주역입니다. 이런 마당에 임계승 따위는 날파리 하나에 불과하지요." 임군이 황제를 만났기 때문에 날파리가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는 뜻인가? 아니면 더 커지기 전에 제거해버린다는 뜻인가?

"그 아이는 너와 동갑이고 네 친구인 셈이잖아. 구해낼 방도가 없겠는가?"

"차라리 보상 운동을 잠재우는 게 쉬울 겁니다."

서석림이 갓을 벗고 금릉의 여린 손을 잡았다.

"나도 자네들이 어여쁘게 사는 것을 보고 싶었네. 재판이 있을 거니까 기대해보자."

"면회는 할 수 없나요? 직접 물어봐야겠어요."

금릉은 소리치며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앵무가 그녀를 껴안는다. 금릉이 앵무의 품에 안긴다. 이따 면회 신청을 해보자. 앵무가 금릉의 등을 두드리곤 서석림에게 눈을 돌린다. 감옥소에 동행을 해주길 바라는 표정이다. 서석림은 경제계를 이끄는 거물이 아닌가. 은행들과 각종 공장과 농원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상층부 일인들과도 거리가 멀지 않다. 기루에 들러 기녀들과 시화(詩畵)를 즐겨 나누는 석재도 있다. 이사청 수장인 부이사관이 대구로 부임할 때 열흘 동안 석재의 자택에서 숙식을 하기도 했다. 앵무가 호소를 하면 석재는 언제든 달려와 줄 것이다.

그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앵무에 안겨 흐느끼면서 금릉은 한 줄기 햇살을 느낀다.

앵무와 금릉은 접견실을 나와 댓돌로 내려선다. 서석림와 박해령에게 허리를 깊이 숙이고, 마당을 가로지른다.

성을 허물면서 생긴 먼지가 구름처럼 떠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라선지, 먼지 구름은 분지를 쉽게 빠져나가질 못한다. 뿌연 연기 같은 것이 퍼져 있지만 그것이 폐허처럼 허물어진 성곽 위를 좇아 하늘에서 환(環)을 그리고 있다고 금릉은 생각한다.

수창사에는 이전보다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이는 것 같다. 부역을 나오면서 한 푼씩 들고 수창사를 찾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계산성당 앞 연설회장은 연일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서울에서 내려온 지도부 인사들이 성당 앞 개울에서 연설을 하면 부역을 마친 사람들이 모여들어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이날도 계산성당 개울 건너에는 많은 이들이 앉아 있다. 자신의 손으로 성곽을 무너뜨린 미묘한 죄책감이 수창사와 계산성당 앞으로 사람들을 모여들게 한 것인가. 온몸이 먼지투성이여서 손을 흔들어 환호할 때마다 사람들 머리 위로 허연 먼지가 풀썩풀썩 일어난다.

금릉과 앵무도 개울 둑에 앉는다. 계승이 이 일로 잡혀갔고 자신도 어제까지 허물어진 성곽의 돌을 날랐으나 부민들과 섞여 연설을 듣는 게 왠지 위안이 된다. 먼지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는 것 같더니 굵은 빗방울이 우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둑에 앉은 군중들이 비를 피해 나가려다 다들 그냥 앉는다. 연설자가 목청껏 소리 지른다. 금릉도 박수를 친다. 비가 쏟아진다. 빗줄기가 거무튀튀하다. 성곽 모양으로 허공에 떠 있는 먼지구름에서 비가 쏟아지고 있다고 금릉은 생각한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거무스름한 빗줄기가 얼굴에 흐르고 옷을 적시는 옆 사람을 보면서 금릉도 벌떡 일어나 공중으로 손을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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