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비극사/ 일란 파페 지음/ 유강은 옮김/ 열린책들 펴냄
"그자들은 우리를 한 명씩 끌어냈다. 할아버지 한 명이 총을 맞았고, 그 딸이 울부짖자 딸도 총을 맞았다. 그러고는 내 형 무함마드를 불러내서 우리 앞에서 총을 쐈다.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면서-아직 젖먹이였던 여동생 후드라를 안은 채로-쓰러진 형을 끌어안자 그자들은 어머니한테도 총을 쏘았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가 아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저지른 만행도 아니다. 나치 폭압으로 뼈아픈 시련을 겪은 유대인들이 저지른 '종족 청소'에 대한 회고다. 1948년 4월 9일 유대 군대는 예루살렘 서쪽 언덕 위 '데이르야신'이라는 마을을 점령했다. 시온주의자가 '이스라엘 땅'을 되찾으려는 학살과 강탈, 그리고 추방은 계속됐다. 기관총을 난사해 주민을 죽이고,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한 장소에서 냉혹하게 살해했다. 한쪽에서 시체를 훼손하는 동안 다른 쪽에선 여성을 강간하고 죽였다.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유대인이 3년 만에 저지른 일이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국가는 시온주의 운동이 본격화한 지 1년이 채 안 돼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새로운 나라가 탄생했다. 이스라엘이다.
세계의 암묵적 동조 또는 적극적 외면으로 사라지고 만들어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용감하고 강직하게 비판한 일란 파페 교수가 '팔레스타인 비극사-1948, 이스라엘의 탄생과 종족청소'(The Ethnic Cleansing of Palestine)를 펴냈다. 제목만 봐도 팔레스타인의 운명이 얄궂다. 이스라엘 하이파 출신인 저자는 이스라엘의 비윤리적인 건국 과정을 고발하며 추방당한 팔레스타인 난민의 조건 없는 귀환을 주장했다. 이 탓에 하이파 대학에서 파면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역사의 이면을 드러내며 '가장 용감하고 강직하고 날카로운 이스라엘 역사가'로 평가받고 있다.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
이 책은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을 '종족 청소'라는 관점에서 파헤친 역사서다. 저자는 종족 청소를 '특정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종교'종족'민족 등에서 유래하는 근거에 따라 주어진 영토에서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명확한 정책'이라고 정의한다. 폭력을 수반하며 군사작전과 연결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차별에서 절멸에 이르기까지 한 집단의 역사를 지울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세력은 섞여 살던 땅에서 다수를 차지하던 아랍인을 쫓아내고 유대인을 다수로 만드는 '플랜D'(플랜 달렛)라는 계획을 체계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주택과 재산에 불을 내고 사람들을 몰아냈으며, 쫓겨난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곳곳에 지뢰를 묻었다. 13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몰아내고 60만 유대인의 왕국을 건설하는 '대청소'는 1년도 채 걸리지 않아 끝났다. 팔레스타인인의 85%가 난민이 돼 이집트, 레바논 등을 떠돌고, 일부는 요르단강 서안 일부와 가자지구에 남았다.
◆세계가 눈감은 범죄
홀로코스트 이후 대규모 반인도적 범죄를 감추기는 거의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하나의 범죄'는 전 세계 대중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팔레스타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주도로 영국의 지지, 아랍의 분열과 외면, 그리고 다른 국가들의 방조나 묵인에 의해 체계적으로 부정됐다.
유대인이 처음부터 이 계획을 완벽하게 구상한 건 아니었다. 이들의 막연한 꿈이 실현된 것은 1917년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가 '영국 통치령인 팔레스타인땅에 유대민족의 나라를 세우게 해주겠다'는 선언을 하면서다. 절대다수인 팔레스타인인은 반발했다. 하지만, 1936년 반란에서 영국군에 의해 지도부가 해산하고 전투조직이 와해하면서 팔레스타인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신세가 됐다.
이즈음 유엔도 엉뚱한 해결책을 내놓는다. 멀쩡하게 가꿔온 땅 절반을 시온주의에 넘겨야 한다는 것. 전체 인구의 3분의 1, 전체 면적의 6%를 차지했던 유대인에게 영토 절반을 할양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이 1947년 11월 유엔총회 결의안 제181호로 채택됐다.
그 뒤 배타적인 유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시온주의자들은 거리낌 없이 플랜달렛을 실행에 옮겼다.
◆비극은 계속…
종족 청소 이후는 더 잔혹하다. 그래서 이곳의 비극은 현재진행형이다. 전투가 잦아든 틈에 돌아온 피란민을 포로로 가둬 강제노역을 시켰고, 이슬람 성지를 레스토랑이나 상점으로 바꿔 팔레스타인의 정신에도 상처를 입혔다. 전체 영토의 3%밖에 안 되는 곳에 살게 했고, 130만 명에게서 1억파운드를 몰수했다. 여성은 겁탈당했고, 빈민가로 강제 이주당했다. 아랍어로 된 마을 이름조차 히브리어로 바꿨다.
팔레스타인인을 내쫓은 마을 위에는 국립공원과 녹색 생태 휴양지를 조성했다. '유대민족기금'은 그렇게 팔레스타인의 흔적과 역사를 지워나갔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교과서에는 학살과 추방 대신 '유대 쪽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그냥 남으라고 설득했다'는 거짓 역사가 기록됐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가자지구 무장 정파 하마스는 평화를 해치는 테러리스트라는 오명을 썼고, 중동 분쟁의 불씨가 됐다. 가자지구 공습으로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사상자 수와 피해 정도가 압도적인데도 팔레스타인 동정론은 이스라엘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국가들에 밀렸다. 2012년에야 UN 비회원 옵서버 단체에서 비회원 옵서버 국가 단계로 격상됐다.
파페는 불모의 땅을 녹음이 우거진 풍요의 땅으로 바꿨다는 이스라엘의 건국 신화를 꼬집는다. 이스라엘이 법적'도덕적 책임을 지고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를 회복한다면 분쟁의 땅에도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가깝지만 먼 나라'에도 통하는 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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