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른 아침에] 아! 가을인가

평양고등보통학교
평양고등보통학교'연세대(영문학)'보스턴대 대학원(철학박사) 졸업. 전 연세대 부총장. 현 태평양시대위원회 명예이사장

가을 깊어가고 나의 마음도 익어가

누가 석양빛 어디 쓸 것인가 물으면

"남은 날들 이웃을 사랑하며 살겠다"

'가을병' 앓는 사람 위로하고 싶어

어느새 무덥던 여름이 가고 아침저녁으로 싸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 가을인가." 입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한마디씩 뇌까리게 된다.

중국 송대의 대학자 주희는 젊은이들에게 세월이 빠르다는 사실을 일러주면서 면학에 힘쓸 것을 권고하였다. "오늘 공부하지 않으면서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마라. 금년에 공부하지 않으면서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마라.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아, 아! 이제 내가 늙었으니 이것이 다 누구의 허물인가." 주희가 젊은이들에게 공부하라고 권하는 시가 또 한 편 있다. "젊은이 늙기 쉽고 학업 대성하기 어려워 일분일초도 낭비하지 말지니 연못가의 봄풀은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였거늘 계단 앞의 오동나무 잎에는 벌써 가을바람이 분다." 나이 들어서 모두가 후회한다. 젊었을 적에 좀 더 공부하지 않은 사실을. 누구나 늙으면 기억력도 쇠퇴하고 동작도 느려지기 때문에 그때가 되어 열심히 배운다고 해도 젊어서 배울 때처럼 능률이 나지 않는다.

아! 가을인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나로서는 도대체 몇 번째 맞이하는 가을인고! 조선조의 선비 고산 윤선도가 탄식했듯이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을 손 바위뿐인가 하노라". 이 처량한 시 한 수가 저절로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그 가을이 날마다 깊어가는 것만 같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말도 있는데 가을 하늘이 높다는 것은 수긍이 가지만 어찌하여 그 사실과 말이 살찌는 일이 함께 나타나는 현상인지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시인 박목월이 제주에서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고 돌아오면서 읊었다는 '이별'이라는 가을 노래의 둘째 절은 "한낮이 지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적의 감동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의 슬픔도 있는 법이다. 박목월은 3절을 이렇게 읊었다.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인생의 가을이란 그렇게 슬픈 것 아닐까.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은 '눈물이여 속절없는 눈물이여'라는 시를 가을에 노래하면서 "눈물이여 속절없는 눈물이여 나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네 어떤 거룩한 절망의 깊음에서 생겨나 내 가슴에 솟구쳐 두 눈에 고이는 눈물, 행복한 가을의 들판을 바라보며 돌아오지 못할 날들을 생각할 적에". 가을을 맞은 우리들에게 이 시 한 수가 던지는 충격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공부는 안 하고 놀러만 다니는 젊은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내가 이 글을 적고 있지만 내가 오늘 이 글을 쓰는 진정한 동기는 박목월의 '이별'에서 세 번이나 되풀이하는 후렴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라는 한마디가 하도 애절하게 느껴져 '가을을 앓는 병'이 있는 사랑하는 형제들의 서글픈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 고생만 하다 봄, 여름, 가을이 덧없이 가고 눈 내리는 어느 날 늙고 병들어 왔던 곳 찾아서 되돌아가네." 90 인생을 살고 이 한마디를 읊조리며 나는 이 가을을 맞이한다. 아무것도 남기고 갈 것이 없는 인생이었다. 자랑할 것도 없고 부끄러워할 일도 없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석양빛을 어떻게 쓸 것인가고 누가 물으면 나의 대답은 한마디뿐이다. "나는 나의 남은 날들을 나의 이웃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멀리 사는 이들도 있고 가까이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을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사랑하고 있다. 그들이 아닐지라도 오늘 내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나는 나의 사랑을 베풀고 싶다. 나의 사랑은 요란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거절하지 않는다. 거절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가을은 깊어가고 사람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도 익어간다.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그 한 가지뿐이다. 나는 조용히 사랑하면서 살다가 그 사랑을 품고 조용히 떠날 것이다. 어느 가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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