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57, 마지막 회>-엄창석

금릉은 큰 입구 자(口) 형태의 안채와 옆채를 둘러본다. 넓은 마당 한가운데에는 키 작은 백일홍과 적단풍과 매화나무가 곱게 어우러져 있다. 다섯 핸가 여섯 핸가, 앵무의 품으로 들어온 게 까마득한 옛일 같다. 노래를 배우고 가야금을 익혔지. 남자와 시(詩)도 배웠잖아. 어쩜, 남자는 시와 같았지. 가야금 줄 튕겨 상사곡 마치니, 봄은 가고 제비만 남네...... 그런 시 속에 남자가 있었어. 하지만 이것도 오래 전이야. 금릉은 고개를 갸웃 젖힌다. 시가 없어진 뒤로 남자는 짐승이 됐어. 사내와 여인 사이에 흐르는 음악 같은 공간이 지워지자 서로가 닳은 뼈마디처럼 부딪쳤지.

시(詩)든 뼈마디든 이제는 지나간 일이다. 정(情)과 비정(非情)이 한때 소나기를 뿌리고 남풍에 실려간 구름과 같다.

금릉은 사흘 전에 만난 계승을 떠올린다. 칸칸이 나눠진 수비대의 감옥이 객사 뒤쪽에 있었다. 아직 벽돌 감옥을 짓기 전이었다. 석재가 도움을 주어 면회가 성사된 것이다. 감옥 안 면회실에서 계승을 만났다. 그의 모습은 믿을 수 없는 정도였다. 죽통에 머리를 처넣은 삽살개처럼 얼굴이 시꺼멓고 온통 수염투성이였다. 금릉은 차마 마주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함께 가 준, 석재 선생과 앵무 아주머니와 장상만이 계승과 긴 얘기를 나누었다. 금릉은 미리 골라둔 말을 하나도 꺼내지 못했다. 칼과 포승줄에 묶이지 않았지만 수렁에 빠진 것 같은 그의 모습이 앞으로의 모든 것을 일러주고 있지 않은가.

"터널 안에서 붕괴 사고가 났다는 것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들을 해친 것은 아닙니다."

계승의 어조는 책을 읽듯이 침착했다. 금릉의 귀에는 생(生)과의 고리를 놓친 나뭇가지가 툭툭 부러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오빠, 나를 보아요. 내 얼굴을 만져보세요. 내게 다가와 손을 들어서 내 양쪽 귀를 잡고 입술을 맞춰보아요. 그녀는 주먹을 쥐고 그를 보았다. 그의 눈이 잠깐 그녀의 얼굴에 머물다 석재 선생으로 돌아갔다. 힘을 내게. 보름 뒤에 재판이 있다고 하네. 선생님, 저쪽에서도 증인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자네가 그때 일을 소상히 밝히게. 또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던가. 후루쇼 경보부가 다가왔다. 후루쇼가 석재에게 절도 있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석재 선생님, 걱정 마십시오. 일본은 조금의 부당함도 없이 공정한 법으로 이 사건을 처리할 것입니다. 후루쇼가 언제 한국어를 저렇게 잘했지? 떡과 고구마를 넣어주고 면회실을 나왔다. 후루쇼의 말은 위안일까, 위협일까. 면회실을 찾는 넷은 서로 다른 표정을 지으며 거리로 나섰다.

금릉은 짐을 챙긴다. 새로 얻은 집으로 짐을 옮기는 것이다.

가져갈 것은 많지가 않다. 이부자리, 수저, 다탁, 호롱, 화로....죄다 공동의 것이다. 더러 그녀가 돈을 주고 산 것도 있지만 농루에 두고 갈 것이다.

금릉은 가야금을 가져가야 할지 말지를 망설인다. 처음 악기를 배울 때는 앵무 아주머니의 것이었으나 그후 그녀가 악기를 구입했다. 그녀는 가야금을 기증한다는 생각보다 앞으로 가야금을 튕길 이유가 없기 때문에 두고 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러고 보니 옮겨 갈 게 별로 없다. 벽장에 넣어둔 그림은 가져가야지. 왠지 남자들과 주고받은 시는 버리지 못할 것 같다. 앞으로 사내들과 술상에 앉을 일은 없지만 그들과 나눈 시구에 밴 애틋함과 사모의 정은 허공에 날려버리고 싶지 않다. 그분들의 정이 모두 육욕에서 나온 게 아니야. 넓은 방 안에 홀로 자자니 병풍 속 원양이 부럽기만 하네(十二湘簾人獨宿.....). 님 만나서 물이 막혀 연밥 던졌는데 사람들에게 들키고서 종일 수줍었네(逢郞隔水投蓮子.....). 당지에 쓴, 이런 시들을 접어 보자기 에 넣는다.

두 해 전, 석재 선생이 풍죽(風竹)을 쳐주었던 속치마가 벽장에서 나오자 금릉은 아연해한다. 손으로 흰 비단치마를 펼친다. 굵은 대나무가 거센 바람에 맞아 땅에 누울 듯이 휘어진 묵화(墨畵)이다. 아니면 몰아치는 바람에 대나무가 활처럼 휘며 튕겨 일어서려는 모양인가. 그림이 마치 예언(豫言) 같다고 금릉은 생각한다. 그후 성이 무너지고 도시가 일색(日色)으로 변하면서 생긴 일들이 눈앞을 스친다. 옥에 갇힌 계승도 풍죽이 아닌가. 바람을 가장 앞서 맞는 기녀들도 한명 한명이 모두 안타까운 풍죽이다.

어제는 농루에 일인들이 단체로 술을 마시러 왔다. 근자들어 일인 손님들이 북적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아무리 올곧은 앵무 아주머니라 해도, 그들이 손님으로 온 이상 접대할 수밖에 없었다. 성이 무너지고 유곽이 생기면 일인들은 그리로 갈 테지만, 유곽으로 옮겨가기 전에 조선 예기(藝妓)의 맛을 보겠다고 찾아든 것이다. 갑자기 손님이 느는 까닭을 넉넉히 짐작하지만, 기녀들은 그들 앞에서 노래와 시를 써 보인다. 그러니 은낭화, 설루, 옥매......그녀들도 하나 하나 슬픈 풍죽이 아닌가.

"김씨가 금릉의 짐을 새 집으로 옮겨다 주세요."

마당에 나와서 앵무가 김씨에게 이른다. 하지만 미리 이사하는 것을 알고 김씨는 농루 앞에 나귀를 대기시켜 놓았다. 짐이 형편없이 적은 것을 보고 지게로 나를까 하다가 김씨는 나귀 수레에 금릉은 짐을 싣는다. 옷가지와 보자기 몇 개, 다탁과 노리개와 베개를 싣고 나자 작은 수레가 반도 차지 않는다. 설루가 이사 간 집까지 같이 가주겠다고 나선다.

"아주머니, 자주 들를게요."

"그러겠니?"

"네. 멀지 않은데요뭐."

앵무는 그녀는 꼭 껴안는다. 기적이 없어졌으니까 농루에 온다 해도 술잔은 잡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이 갑자기 서운하다. 농루를 떠남이 지난 여섯 해의 젊음이 허공에 날리는 것 같아서, 그녀는 앵무의 품에서 잠깐 몸서리를 친다.

금릉과 설루는 수레를 타지 않고 수레를 뒤를 따라 달서교로 내려온다. 김씨는 나귀 고삐를 잡고 앞을 보며 걷는다. 참 청정한 날씨다. 버드나무는 어느새 푸르렀고 며칠 전의 비로 불은 개울물이 티 없이 맑다. 수레 뒤로 아이들이 재잘대며 따라온다.

수레는 번잡한 달서교를 건넌다. 달서교 앞 뒤로 사람들이 많이 지나간다. 이날이 장날인가. 금릉은 수레를 따라가다 흠칫, 뒤를 돌아본다. 뒤에서 길을 비켜라는 고함소리가 들린다.

이상하지 않아? 짐을 옮긴 날은 5월 2일데, 그녀의 기억은 5월 7일에 머문다. 나귀 수레를 따라가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본 게 그날이 아닌가. 서문과 달서교 사이로 많은 이들이 붐빈다. 사나운 고함 소리에 사람들이 우르르 양 옆으로 비켜서고, 남문이 무너진 텅 빈 자리로 또 다른 수레가 등장한다. 말이 끄는 그 수레에는 무엇이 얹혀 있던가. 우물 두레박 걸이 같은 커다란 삼각형의 각목들이다. 십수 개의 각목이 수레에 세워지거나 눕혀져 있다. 그것이 교수형 형틀이라는 것을, 금릉은 금방 알아챈다. 수레 양쪽으로 붙어서 일본 수비대들이 총을 가슴 앞으로 모아 쥔 채 저벅저벅 걷고 있다. 수레 뒤로 조금 떨어져서 한 떼의 죄수들이 걸어오고 있다. 포승줄에 묶어서 끌려오고 있다. 그러나 발을 바닥에 끌 뿐 아무도 비틀거리거나 몸부림치지는 않는다. 어쩌면 가벼운 걸음으로 당당하게 걷는 죄수들 무리 속에서 계승이 끼어 있음을 발견한다. 금릉은 눈이 파르르 떨린다. 면회 간 날, 보름 뒤에 있을 거라는 재판이 갑자기 닷새나 당겨졌다는 사실은 금릉이 나중에 알게 된다. 청송에서 잡혀온, 부유한 호족을 살해한 화적들이 재판을 받을 때 임계승의 건도 같이 취급되었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전날 재판에서 교수형이 떨어지고 다음날 해가 지기 전에 형장으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도.

금릉은 주춤주춤 구경꾼들과 멀어진다. 구경꾼들의 흐름을 보아 계승이 어디쯤에 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형틀과 죄수와 수비대 군인들이 달서교를 건너고 큰장 서쪽으로 가로지른다. 시장이 끝나고 내비동이 시작되는 구릉에서 형틀을 땅에 박을 것이다.

금릉은 흐르는 무리들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계산성당 건너편, 계승이 얻은 집으로 들어선다. 작은 기와집은, 이사한 날 이후로 수없이 쓸고 닦고 하여 마루와 문짝과 방이 제법 말끔하다. 그러나 가져온 짐들은 풀지 않아, 새로 산 이부자리만 방 한쪽에 포개져 있다. 그녀는 다시 걸레를 빨아 기둥을 닦으려고 한다.

갑자기 손목에 힘이 풀린다. 걸레를 집을 아귀힘조차 없다. 그녀는 망연해 하다 방 구석에 둔 금빛 종(鐘)에 눈이 간다. 서울로 가기 전에 계승이 준 종이다. 사람들이 버린 담배통을 녹여 만든 종이라 했지? 그녀는 주먹만 한 종을 흔들어본다. 경쾌한 종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린다.

금릉은 방을 나와 집을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굴뚝으로 뚫린 처마, 뒤쪽 문, 곳간 기둥이 계승의 손길을 얻다 말고 멈춰 있다. 그것을 보강하다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서울로 떠났지? 그가 언제 돌아와 남은 곳을 고쳐 줄까? 그녀는 거기서 생각을 멈춘다. 지금쯤, 내비동 구릉지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계승이 떠오르다 사라진다.

그녀는 쌀을 사와 저녁밥을 지어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사 온 후로 며칠 동안 식점에 가서 밥을 사먹었다. 식점 문을 열지 않은 아침은 그냥 굶었다. 그녀는 집을 나선다. 골목을 나서자 높은 성당 첨탑이 눈을 막아선다. 엷은 노을빛이 첨탑에 걸려선지 기괴한 건축물이 쓸쓸해 보인다. 그녀는 싸전에 가지 않고 성당 건너 개울둑에 앉는다. 언제였지? 계승이 집 수리할 재목을 지게로 져 오다 개울가에 앉은 것이. 그때 그녀도 계승 옆에 나란히 앉았다. 지게를 등 뒤에 세워두고서. 성당 앞에서 어떤 연사가 목청껏 소리를 높이고 있었어. 계승은 지게 작대기에 턱을 괴었고 그녀는 치마를 말아 붙이고 무릎을 안았지. 그때처럼 금릉은 둑에 앉아 치마를 허벅지에 붙이고 무릎을 안는다. 성당 앞은 한 사람도 얼씬거리지 않는다. 오늘따라 개울가에 아무도 없다. 강아지와 오리 몇 놈만 물가를 돌아다닌다. 그녀는 경사진 둑을 이용해 무릎에 손을 얹고 턱을 괸다. 한참동안 텅 빈 연단을 바라본다. 그럴 때였다. 배에서 뭔가 꼼틀거리는 것 같다. 뭐지? 금릉은 놀라워하면서 허리를 편다. 배에 손을 대본다. 손끝에 미동이 느껴진다.

아까도 이렇지 않았어? 조금 전 방에서 종을 흔들 때도 배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았잖아! 그녀는 믿을 수 없어 하며 손가락을 꼽아본다. 몇 달 전으로 줄곧 거스르면서 날짜를 짚는다. 그러고 보니 달거리를 안 한지도 꽤 된 듯했다. 성당 앞으로 개 두 마리가 달려간다. 앉아 있던 새들이 날아오른다. 버찌 몇 알이 나무에서 톡톡 떨어진다. 그녀는 옷 속으로 손을 넣는다. 살금살금 배를 쓸며 귀를 기울인다. 또 미동이 손끝에 묻는다.

금릉은 입술을 달싹여 계승을 불러본다.

"여보......"

아까 미동하던 배가 잠잠하다. 금릉은 다시 귀를 열고 고개를 숙인다. 달서교 쪽 개울둑을 따라 사람들이 걸어오는 게 보인다. 큰시장 뒤 구릉지로 갔다온 사람들이 돌아오는 모양이다. 수많은 이들이 왁작왁작 발소리를 내면서 서문 쪽으로 흩어지고, 또 성당 앞으로 몰려온다.

도시를 덮은 구름 속으로 노을빛이 번진다. 하늘이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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