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동대구역에서 시를 읽다

박남일
박남일

새해 첫날이면 나는 동대구역으로 간다. 동해남부선 완행열차에 오르려는 것도, KTX에서 내리는 서울깍쟁이 마중하려는 것도 아니다. 샅만 가린 뗀석기인(石器人)들이 돌칼 쥐고 멧짐승 사냥 나가듯, 나는 허리춤에 술잔(盞)거리 질러 넣은 채 여덟아홉 부 일간지 주워담으러 간다. 일월 일일 자 신문 근(近) 열 부면 부픈짐이어서 신춘문예 작품 빼고는, 쌀에서 고른 뉘 버리듯, 쓰레기통 속에 은근슬쩍 밀어 넣는다.

참새가 올조 밭을 그저 지나랴, 올해 첫날도 어김없이 번주그레하게 빼입은 선남선녀들 왁실왁실하는 정거장 대합실에서 쉬지근하지 않고 싱둥한 시들을 데려왔었다. 고것 중 두 편을 다시 읽는다.

"군함처럼 큰 발을 끌고/ 아버지가 낭떠러지까지/ 오두막집을 밀고 갔다가/ 밀고 왔다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며/ 말기 암, 엄마를 재우고 있다/ 죽음을 데리고 놀고 있다/ 죽을까 말까 죽어 줄까 말까/ 엄마는 아빠를 놀리고 있다/ 아기처럼 엄마처럼/ 절벽 끝에서 놀고 있다"(석민재의 시 '빅 풋')

언어 혹은 언어의 진술만을 놓고 보면 갈데없는 동시다. 반면 시의 내면은 가없이 웅숭깊다. 근처에도 못 가 본 탓일까, 나는 '낙관'이나 '달관'이란 말에 경외감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달관' 하면, 조지훈의 시 '완화삼'(玩花衫)에 대한 화답 시인 박목월의 '나그네'의 구절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를 떠올린다. 시 '빅 풋'이야말로 달관의 극치를 보여 주는 시다. 덜미에 사잣(使者)밥을 짊어진 엄마와 그를 병(病)시중하는 아버지를 일러 '벼랑 위에서 서로 놀리며 놀고 있는 아기와 엄마'라니. '큰 발'이란 제목도 재미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엄마와 하고많은 날 혼자서 즐겁게 놀아 주는 아버지가 얼마나 미쁘면 "군함처럼 큰 발"이라 할까.

"삼국 시대부터/ 바위 속에서 나오기 시작했다는/ 부처님// 아직도 나오고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 뒤쪽은 못 나왔는데/ 그래도 좋은지/ 웃고 있다"(박경임의 동시 '서산 마애불')

마애불을 사람들은 정적인 것 즉 암벽에 새긴 불상으로만 아는데, 시인은 동적인 존재 즉 바위에서 나온 부처로 격상시켜 놓는구나. 까짓것 바위에서 나왔다 치자, 그래도 그렇지. 마애불을 우리는 과거완료형 즉 백제 말기에 이미 다 나온 걸로 아는데, 시인은 현재진행형 즉 천 년은 좋이 지난 시방도 빠져나오는 중이라나. "몸 뒤쪽은 못 나왔는데/ 그래도 좋은지/ 웃고 있다"고? 우리도 그 부처님 따라 싱그레 웃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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